온기에도 잔상이 있다는 걸

: H에게

by 홍연

H에게



안녕, 긴 연휴 끝에 다시 찾아온 주말이야. 너는 아마 출국을 준비하느라 분주할 거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분주하게 삶을 살아나가고 있어. 너를 만날 때는 온 세상을 지워버릴 듯이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며칠 사이에 눈은 온데간데 없어.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말야, 그 날 너를 만난 것까지도.



오랜만에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렘과 긴장이 교차하는 시간이었어. 내가 너무도 애정해마지 않는 너라서 그저 반갑고 설레는 마음이고 싶었지만, 오늘은 내가 오랫동안 숨겨온 내 비밀을 이제는 너에게 말해야겠다는 각오를 하고서 가는 길이었거든. 나는 오랫동안 큰 비밀을 하나 쥐고 너를 대했고, 너는 알면서도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억지로 캐묻거나 한 적이 없었어. 그저 기다릴 뿐. 무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어느날 너는 내게 말했어.



'내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너를 이해 못해주겠냐'



세상 살아가면서 온전히 내 편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고마운지. 그 말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해준 말이었다면 더없이 든든했겠지만 그렇지 않았으므로, 난 그저 씁쓸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어. 하지만 그 순간의 네 마음이 진심이라는 건 모르지 않아서 마음만큼은 감사히 받았지. 언제 실망하고 등 돌릴지 몰라도 네가 이런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면서. 오히려 그런 마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끝내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던 거야.



오래 너를 알고지내다 보니 너의 상처도 조금씩 알아가게 되고, 네 비밀도 알게 되었어. 네가 그런 마음이었듯, 나라고 달랐을까.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그럴 수 있지'하고 이해하게 되더라고. 네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던 내가 알고 있는 너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이제 숨기는 사람은 나만이 남았다. 과연 너는 나를 이해해줄 수 있을까? 내가 아는 한 가장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면을 가진 네가 나의 모난 과거를 이해할까?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은 이런 생각으로 이루어진 길이었다. 어지러운 글자 위를 한 발씩 밟아나가며. 설령 너를 잃게 된다해도 이제는 반쪽짜리 모습으로 너를 대하고 싶지 않아진 나의 서툰 결심으로 그렇게 한 발씩.




함박눈이 쏟아지는 밤, 술잔을 기울이며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막힘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너와의 대화는 늘 잘 통하고 편안해서, 지금까지 많이 웃었고 그 날도 나는 참 많이 웃었다. 그리고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을 때, 조금 듣던 너는 나를 배려해 잠시 나가서 마저 이야기하자고 그랬지. 내 어깨에 자신의 외투를 걸쳐주며. 나는 그렇게 너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가.



더듬더듬 어렵게 내 이야기를 다 끝냈을 때, 나를 향해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너는 말했다.



"괜찮아, 잘했어 잘했어"



그러더니 나를 끌어다 푹 안아주었지. 등 뒤로 느릿하게 다독여주는 너의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잘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 하지만 이제는 그 날의 내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는 것 역시도 알아. 더이상 스스로 자책하지는 않지만, 누군가에게 내보일만한 일 역시도 아니라는 걸 뻔히 아는데. 그 일을 두고서 내가 그동안 단 한번이라도 잘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던가?― 너는 어째서 내게 잘했다고 말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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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조금 지나서야 알았어. 너는 여전히 내 편에서 온 힘을 다해 날 위로하고 있단 걸. 그 일이 있은 후, 지금까지 숱한 위로를 받은 동시에, 많은 질책도 받았기에 나는 어떤 말을 들어도 크게 동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어. 하지만 손톱만큼도 나를 탓하는 기색이 없는 너의 목소리가 마음 어딘가를 툭하고 무너뜨려 버리는 걸 느꼈다. 작은 구멍 하나가 댐을 무너뜨리 듯이 그렇게 와르르.



나는 오래도록 그 날 네가 전해준 온기를 잊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어. 그렇게 네 위로 한 마디는 나를 다시 수십년을 달려나가게 할 힘이 될 거라는 사실도. 난 힘들고 지쳐 포기해버리고 싶을 때마다 저 말 한마디를 손에 꼭 쥔 채로 다시 일어날 거야. 이것만큼은 절대 놓지 않을 거라는 듯이.


이토록 오래가는 온기라니, 어쩌면 온기에도 잔상이 있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따뜻한 커피가 놓여있던 책상 위를 만지는 기분으로, 너의 다독임을 기억해. 가슴을 둥둥 울리던 너의 위로를 기억해. 정말로 그저 '나'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걸 이해해주는 너의 마음을 기억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나를 따뜻하게 덥히는 네 온기가 그 날을 떠올리게 해서 고맙다고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어. 네가 전해준 마음에 비하면 고맙다는 말은 하찮기 그지 없지만 어차피 그 어떤 말로도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없으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어. 빈약한 말이지만 고마워. 고마워.


너에게 나의 온기를 담아,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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