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게도 봄이 올까

: H에게

by 홍연

H에게



요즘 따라 유난히 바람이 차갑게 느껴진다. 같은 바람이라도 기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걸 알면서도, 오늘의 바람은 유독 더 거칠고 날 선 것만 같다. 언젠가부터 나는 계절의 변화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예전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설레는 감정을 느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저 덤덤하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는 게 당연한 순리일 뿐, 더는 그 변화에 가슴이 뛰지 않더라.

그런 나에게 어느 날, 네가 물었지.

"너는 어떤 계절을 좋아해?"


예전 같았으면 ‘봄이 제일 좋아’라고 대답했을 거야.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거리에 꽃이 피어나고, 옷차림도 가벼워지는 봄이. 그런데 막상 대답하려고 보니, 나는 요즘 어떤 계절을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좋아하는 게 없어진 걸까, 아니면 좋아한다는 감정 자체를 잊어버린 걸까.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충 얼버무렸다.


"음… 그냥 다 괜찮아.“


너는 피식 웃었고, 나는 그 미소를 보며 어쩐지 들킨 기분이 들었어.

나는 지금, 겨울을 살아가고 있다. 주변은 여전히 따뜻한 색으로 물들어 있고, 거리에는 웃음소리가 가득하지만, 내 마음은 차갑고 얼어붙어 있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봄을 맞이하는데, 나만 혼자 계절을 건너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어제는 퇴근길에 우연히 벤치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를 보았다. 허리가 구부정한 모습으로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아주머니는, 손끝에서 작은 꽃 한 송이를 흔들고 있었다. 아직 봄이 오려면 한참 남았는데, 그 손에는 노란 개나리가 들려 있었다. 어디서 꺾어 오셨을까. 나는 걸음을 멈춘 채 한참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예쁘죠?”


갑자기 아주머니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매년 봄이 오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결국 봄이 오긴 오거든요. 그래서 견딜 수 있는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나는 가만히 손을 바라보았다. 내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견딘다’는 말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정작 ‘봄을 기다린다’는 마음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저 겨울을 견디고만 있었지, 그 끝에서 올 따뜻함을 기대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아주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때였나. 겨울이 끝나고 얼음이 녹으면, 학교에서는 화분을 키우는 일을 숙제로 내준 적이 있어. 내가 심은 화분에 무언가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관찰일기를 썼었지. 나는 그게 신기해서 매일 아침마다 지켜보았고, 어느 날 그 새싹이 꽃을 피웠을 때 마치 내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기뻐했었다. 그때의 나는, 봄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어제 너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어. 우스개 소리를 잘하는 너였는데, 그날따라 무언가 지친 모습이었다. 내 집요한 물음에 너는 슬쩍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인생 망한 거 같아“



그 말 한마디가 이렇게 무겁게 들릴 줄 몰랐다. 나는 무어라 위로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너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몇 년 전, 내가 힘들어할 때 누군가 내게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결국 봄이 오긴 오더라고.“



그때 그 말이 나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던 것처럼, 너에게도 닿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대로 전했다. 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겠지"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셨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겨울을 견디는 게 아니라 봄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어. 견디지 말고, 이제는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너를 위로할 자격이 생길 것만 같았어.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한동안은 겨울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내게도 봄이 올까? 아직은 잘 모르겠어. 다만, 아주머니가 말했던 것처럼 겨울이 길어도 결국 봄이 오는 거라면, 나는 그 시간을 조금 더 버텨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나는 오늘도 다시 살아간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봄이 찾아올 거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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