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방송일에 발을 들이고 나서 나는 오랜 시간 ‘라디오 작가’를 꿈꿨다.
업으로 삼는 일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어서였다. 갖가지 사연을 쓰고 담으며 살아보지 못한 인생에 대해 혹은 살아갈 수 있는 인생에 대해 들음으로 위로와 격려를, 공감을 하고 싶었다.
서른 해를 넘게 살다 보니 어느덧 김광석 아저씨의 ‘서른 즈음에’ 가사를 음미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이런 노래가 어느 날의 이야기와 맞아떨어질 때는 ‘아 어쩌면 서른의 누군가도 나를 닮아있을 텐데 _혹은 누군가의 서른에 내가 있을 텐데_’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공감대라는 건 깊고 넓어질수록 때에 따라 버티고 나아가는 힘을 굳게 하기에. 기회를 잡지 못했거나 놓쳐서, 혹은 기회를 만들어낼 생각조차 못 하고 라디오 작가란 나의 수식어는 지나갔다.
그래도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가진 사람이 됐으면 하는 바람은 사는 내 줄어들지 않는다. 사연을 나눔으로 무게는 나눠 들고, 소리는 나눠 듣기를 희망한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수다쟁이가 이제는 하는 것보다 듣는 것에 무게를 싣고자 한다. 화려한 방송계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 결코 화려하지 않은 마음의 소리, 조명이 비추지 못하는 그 어딘가의 공기를 담아내고 싶다. 그러다 문득 그 직업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사람들의 사연은 창문을 열고 보이는 건너 창문에서도 만들어지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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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