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잘 생겼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사진첩에 붙어있는 오래전 아빠는 늠름한 미남형임을 인정한다.
장교복을 입고 두 명의 다른 남자와 바위에 걸터앉아 폼 잡은 사진만 봐도 인물이 가장 좋다.
결혼식 사진은 내 부모가 맞나 싶을 정도로 싱크로율만 있을 뿐 전혀 다른 분위기의 미남 미녀가 미소 짓고 있다.
앳된 얼굴인 엄마는 작고 동그란 얼굴에 속 쌍꺼풀이 매력적이고 오똑한 코, 얇고 야무진 입술이 배우처럼 눈부시다.
14살 차이라고 믿기 힘든 아빠는 엄마보다 눈이 크고 시원한 인상에 고급스러움마저 느껴진다.
옛날 사람인데 옛날 사람 같지 않은 느낌.
찢어지게 가난한 내 부모 얼굴은 고생하지 않은 부유함마저 느껴진다.
돈만 있는 졸부 같은 느낌이 아닌 지성까지 겸비한 엘리트 스타일 아빠를 엄마는 과연 사랑하지 않고 결혼한 게 맞을까 의심하기도 했다.
첫눈에 반했다 해도 의심하지 않을 것 같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아빠를 사랑했다 말하지 않는다.
부모의 연애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나는 모른다.
굳이 궁금하지도 않은 두 분의 연애 시절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저 누런 접착제 비닐 안에 붙어 있는 사진 속 그들을 볼 때마다 놀랍고 슬펐다.
이토록 아름다운 남녀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세월이 불쌍하고 안타깝다는 느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들은 달라졌을까.
무엇을 바로 잡아야 불행이 행복으로 변할 수 있었을까.
사진을 보며 상상했다.
둘의 딸로 정해진 운명이라면 무엇을 바꿔야 정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날 수 있었을까.
엄마에게 듣는 아빠는 단편적이고 숏츠처럼 잘려있다.
1967년도 서울에서 3층 양옥집과 가정부를 두고 살았던 적이 있었다는 말.
땅부자였던 아빠는 집과 땅을 모두 팔아 큰 봉제공장을 지었다는 말은 귀에서 고름이 나올 정도로 듣고 또 들었다.
일본인 동업자에게 사기당하기 전까지 아빠는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고 한다.
일본을 오가며 무역하던 아빠는 영업을 잘했을 것이다.
사교적이고 친화력 있는 아빠는 유창하게 말한다.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일본어에 능하고 한자를 많이 아는 아빠는 국문학을 전공한 장학생 출신이다.
아빠의 장점과 자랑거리는 귀를 틀어막고 싶어도 막지 못해 매일 들어야 하던 레퍼토리였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온 사람.
100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먼 친척까지 찾아와 부탁하면 취직시켜 먹여 살리던 성공한 사업가.
권력과 권위, 명예와 부를 평생 가질 수 있을 거란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망한 현실을 인정할 수 없기에 폭력적인 사람으로 변한 것인지 원래 폭력적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엄마의 단편적인 말에 의하면 오빠들은 부유할 때 자랐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고 했다.
내가 3살 때 망했다고 했으니까.
"내가 이러고 살 사람이 아니다."
"내 앞에서 얼굴도 못 들던 것들이."
친척이 다녀가면 수없이 듣던 말들.
모든 이가 자기 밑이고 자신 위에 사람은 없는 것처럼 말하는 아빠 말을 스치며 들었지만 스치지 않고 가슴에 쌓여갔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 통장님으로 불리던 아줌마가 있었다.
그 시절 통장의 권위가 어떤지 모르지만 부동산이 없던 시대였으니 통장을 통해 집을 거래했다고 한다.
통장님 집은 놀이터 옆집이었다.
놀이터에서 사는 내 입장에서 매일 볼 수밖에 없는 어른이다.
지나가는 어른들은 그녀를 보면 인사하고 그녀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 동네 반장이니 그녀의 권위가 반장처럼 높은가 보다 생각했다.
얼굴이 크고 남상이었던 통장은 약간 권위적인 모습처럼 보였는데 아빠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아빠 집에 계시니?"
그녀가 가끔 내게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녀가 엄마를 찾은 적은 없다.
늘 아빠를 묻고 무슨 일이 있으면 집에 와 아빠에게 상의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사사로운 개인사까지도 아빠에게 상의하곤 했다.
그녀의 말에 경청하고 대답하는 아빠는 집에서 보는 모습과 달랐다.
학교 선생님처럼 품위 있고 많이 배운 사람처럼 느껴졌다.
통장은 한자를 모르는지 봉투를 들고 와 아빠에게 한자를 부탁한 적도 있고 서류 같은 걸 들고 와 물어보기도 했다.
아마도 그녀는 한자를 많이 아는 아빠에게 어려운 서류 작성을 부탁하고 말솜씨 좋은 아빠가 의지할 수 있는 이웃이라 느꼈나 보다.
품위 있는 어른처럼 행동하는 건 통장뿐만 아니라 아빠 일을 도와주는 트럭 기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예의 바른 목소리로 전화해 일정을 잡고 그가 오고 갈 때면 엄마에게 따뜻한 커피를 내오게 했다.
품위와 폭력을 오고 가는 아빠 모습은 어린 나이에 이해할 수 없는 양면성이었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헷갈렸다.
다정하게 우리 딸 예쁘다고 안아주었다가 가끔씩 치마 속으로 손을 넣는 이중성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