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나는 아버지가 정해준 궤도 위에서 경리업무라는 이름의 잡일들을 처리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경리에 '경'자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아버지는 내가 예고에 가고 싶어 한다는 걸 알면서도 단호하게 반대했고, 결국 나는 인문고를 나와 아버지 친구분의 회사에 떠밀려 들어갔다.
"여자는 예쁘게 조신하게 살다가 돈 많고 직장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면 된다"는 아버지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내 안의 어떤 부분이 조금씩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본 VJ특공대에서 웨딩플래너라는 직업을 소개하고 있었다.
신혼부부들에게 스튜디오와 드레스, 헤어 메이크업까지 결혼 준비 전반을 도와주는 일이었다.
서비스업이라곤 해본 적 없는 내게, 그 일은 묘하게 내 성격과 맞아떨어질 것 같다는 예감을 주었다.
나는 본래 활발하고 적극적인 편이었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무엇보다 25살 때부터 교제해 온 지금의 남편이 있었기에, 아버지의 '개소리'를 무시하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막연한 갈망이 있었다.
변변한 자격증 하나 없고, 학력도 능력도 재능도 내세울 게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차에, 웨딩 매니저라는 직업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다가온 것이다. 상냥하고 인사 잘한다는 소리는 종종 들었으니까.
친구의 소개로 처음 가본 압구정동 뷰티숍은, 요즘으로 치면 연예인들이 드나드는 유명한 곳이었다.
당시에는 아이웨딩 같은 대규모 웨딩플래닝 회사가 없었고, 웨딩플래너라는 직업 자체가 이제 막 생겨나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압구정동이나 청담동의 대형 뷰티숍, 드레스숍, 스튜디오에서 자체적으로 신혼부부들과 계약을 맺고 모든 걸 진행하던 시스템이었다.
면접 당시 원장의 말은, 지금 생각해 봐도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대충 훑어본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 시선이 내 몸 위를 스캔하듯 훑어내려 가는 동안, 나는 이상하게도 내 존재 자체가 평가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강서구에 사시네요. 압구정동은 자주 나와보셨나요?"
"아니요, 오늘 처음 왔습니다."
"스타일을 보니 그런 것 같네요."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확신이 담겨 있었다. 마치 나라는 사람을 한눈에 꿰뚫어 본 듯한.
"지금 입으신 옷은 어디서 사셨나요?"
"동대문에서 샀는데요..."
"66 사이즈 입으시죠?"
"네..."
그 순간 나는 내가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내 치수까지 한 번에 맞춰버리는 그의 시선 앞에서, 나는 그저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인상은 좋아 보이시는데, 솔직히 저희 숍에서 일하시려면 어느 정도 분위기는 바꾸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옷 사이즈도 55 사이즈에 맞춰서 다이어트를 하셨으면 좋겠고, 출근하시게 되면 옷부터 바꾸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는 마치 당연한 이야기를 하듯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갤러리아 백화점에 가시면 타임이란 매장이 있어요. 타임 옷이 그나마 다른 명품들보다는 저렴하니 부담 없이 구입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제가 원하는 웨딩 매니저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우리 숍 손님들은 어느 정도 레벨이 높은 분들이 오시는 곳이에요. 고객님 분위기와 어울리는 직원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 전체가 부정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내 옷차림, 내 몸매, 내가 사는 곳까지 모든 것이 '레벨'이라는 잣대로 평가받고 있었다.
"생각해 보시고 제 뜻과 함께 하실 의향이 있으시면 이번 주까지 연락 주세요. 스타일은 제가 만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면접장을 나서는 순간, 내 눈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거리에 나서자마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보고 촌년이래! 어떻게 사람 면전에 대고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몸매도 뚱뚱하다고 살 빼래!"
그는 무슨 그런 면접이 다 있냐며, 앞으로 거기 갈 일 없으니 기분 풀라고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무언가 단단한 것이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분노였을까, 오기였을까. 아니면 지금까지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 살아온 내 삶에 대한 반발이었을까.
"아니야, 난 내일 전화해서 출근한다고 할 거야. 저 원장, 적어도 88 사이즈는 되면서 나를 무시했잖아.
두고 봐. 내가 일 년 안에 저 원장이 나 없으면 못 살 만큼 애원하도록 만들어줄 거야!"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그 작은 반항이, 그 조그마한 다짐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거라는 걸.
때로는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 가장 모멸적인 순간에서 시작된다는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