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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워홀이 미술계로 본격적으로 발을 딛는 무렵, 미국은 1960년대라는 풍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산업과 군사력, 시스템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성장을 이루어내어 팍스 아메리카나 라는 명성을 얻게된 미국은 문화예술 면에서도 '미국이 낳은 아티스트,' '미국적인 아트'를 원하게 된거죠.
당시까지만해도 여전히 영국과 유럽대륙이 전통적으로 미술의 중심이었고요. 이제 모든 성공을 거머쥔 미국입장에서는 탐탁치 않았겠죠. 대중예술 뿐만이 아니라 고급예술도 미국이 중심이 되어야했으며
여기서 전제는 미국이 낳은 아티스트라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미국 미술은 있었습니다. 추상주의자.. 다다이스트, 모더니스트들... 하지만 이들은 2차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땅으로 건너온 유럽출신의 아티스트들이지요.
그렇기에 미국 이민자의 2세대, 즉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교육을 받고, 미국 사회에서 키워진 세계적인 아티스트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미국에 대한 얘기를 하는 작품이어야 겠지요.
미국적인 미술이란 미국 사회의 특징을 반영하는 미술을 의미합니다. 미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국가들과 비슷하면서도 상당히 다른 면이 있습니다. 이 나라는 다양한 이주민들이 세운 국가로, 종교적 자유를 얻거나 더 나은 삶을 위해 유럽을 떠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동시에, 엘리트층이 주도하는 유럽 사회에 대한 반감을 가진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반 엘리트 주의와 대량생산과 소비로 대표되는 미국 문화안에서 미국적인 것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런 시기에, 앤디워홀은 이민자 2세대로 미국교육을 받고, 뉴욕에서 성장하며 대중사회와 소비매체를 경험한 아주 완벽한 모델이 될 수 있었죠.
앤디워홀은 정확히 미국사회를 간파하는 어록을 남깁니다.
"내가 미국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은 것을 소비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TV를 보고 코카콜라를 마시는데, 대통령이나 우리나 똑같은 코카콜라를 마신다. 돈을 더 준다고 더 나은 코카콜라를 마실 수 없다."
미국에 대한 비판정신 보다는, 미국적인 정신을 계승받고 이를 자랑스러워하는 미국을 대표하는 아티스트 그자체가 표상하는 아트가 만들어질 수 밖에 없겠지요?
미국을 대표하는 아트가 회자 될때마다, 다시 미국의 기업이 광고되고 소비자들에게 끊임없이 인식될 수 있는 효과를 거두어내는 대중소비의 특징도 예술 시장에 깃들어 있지요.
코카콜라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다양한 맛과 디자인을 가지고 있기에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는 어렵지만, 캠벨 수프 이미지는 아름답게 느껴지는 동시에 미국인이 아니라면 이 캔이 가지는 간편식의 이미지가 쉽게 떠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캠벨 수프가 대중적으로 판매되지 않는 국가에서는 오히려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이 등장할 때마다 한 번쯤 맛보고 싶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됩니다.
앤디 워홀의 주요 모티브인 캠벨 수프 통조림과 콜라병은 미국 사회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대중문화와 소비 패턴의 주요 기호로 기능합니다.
워홀은 상업 미술로 시작해 팝아트 운동을 주도했고, 패션 디자이너이자 영화 제작자로도 활동한 인물입니다. 그는 미술을 대중화하는 데 천재적인 역량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부와 명성도 거머쥐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지대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을 추구하는 예술가들 또한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팝아트가 등장하자 대중은 열광했습니다. 팝아트 작가들은 추상적인 소재가 아닌 구체적인 소재에 주목했습니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을 화폭에 담아 미술과 대중의 거리를 좁히려 했습니다. 존스는 미국 국기를, 리히텐슈타인은 만화의 한 장면을 캔버스에 옮겨 놓았습니다.
워홀의 200개의 수프 깡통(200 Soup Cans, 1962) 은 팝아트를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것은 당시 미국에서 유명했던 캠벨사의 수프 통조림입니다.
1960년대 팝아트 1세대는 값싼 대량생산품과 만화를 적극적으로 작품에 적용하며 저급문화와 고급문화를 넘나드는 고민을 드러냈다. 대량생산, 소비문화, 인종문제, 여성인권 등을 비판한 1980년대 이후 팝아트 작품과 구별된다. 대표적으로 워홀의 캠벨 수프(Campbell's Soups)는 대중적인 일상용품이 소비되는 현대 부르주아적 삶의 양면성을 보여줍니다. 노동계급또한 자본을 증식하고 대중 참여자로서 소비력을 갖춘 현대 부르주아, 예술 소비자로서 올라설 수 있지요.
"특히 Campbell's Soup Cans를 선택하면서 Warhol은 저속한 타블로이드의 표현이 풍부한 저지대에서 부르주아 상품 세계의 일상적인 진부함과 시간이 정지된 소비 영역으로 전환했습니다. (...) Warhol이 나중에 Coca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콜라는 이러한 소비재가 세대와 계층을 넘어 안정적인 공통분모를 형성했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현대 부르주아 삶의 지속적인 양면성에 대한 워홀의 풍자입니다.(Varnedoe 43-44)."
워홀이 논하듯이 소비재(제품)는 세대와 계층에 걸쳐 생산과 소비가 반복되면서 안정적인 공통분모를 형성했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는 그들은 대중 민주주의 자체의 제약에 휩싸여서 소비가 반복되는 부작용도 일으킵니다. 수십 년, 세대를 거쳐 반복되면서 정체된 안정감과 회의감을 담는 워홀의 풍자는 현대 부르주아 삶에 대한 그의 양가적 감정을 잘 드러내는 예시입니다.
수프 통조림은 삶에서 소중한 것은 아닐지라도 필요한 것입니다. 워홀은 이 작품을 통해 미국적 대중사회의 일상을 보여주고, 그 속에 담긴 문화적 의미를 묻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은 미술과 비(非)미술의 경계를 허물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이 ‘경계 허물기’에 있다면, 워홀은 미술과 광고의 경계를 허무는 실천을 선구적으로 해낸 것입니다. 팝아트 작가들은 사진, 광고, 만화도 의미 있는 미술 소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