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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크루거:
소비문화를 파고드는 반격

팝아트: 키치함의 예술

by 유하리 Feb 19. 2025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바바라 크루거가 세상에 던진 헤드라인



 ※ 이미지 저작권 문제로 표기 된 외부 링크를 타고 가시면, 관련 이미지를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wikiart.org 




이 카피라이트 이미지가 꽤 친숙하실 텐데요. 미국 예술가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 ”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의 명제가 이렇게 사용되었네요.


크루거는 대중매체, 광고사진의 가장 기초적인 포맷인 ‘이미지’와 ‘텍스트’라는 요소를 예술사진 작업에 도입한 선구적인 예술가입니다.  빨간 테두리에 사진을 꽉 맞추어 편집하고, 대문짝만 한 볼드체로 채우는 게, 그를 대표하는 스타일이죠.


크루거의 작품에서 로고 디자인 영감을 받은 거로 알려진 ‘슈프림(Supreme)이 자신들의 로고를 따라 한 의류업체에 소송을 건 해프닝도 있었죠. 이를 계기로 크루거의 예술작품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었어요. 원조가 궁금했던 거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1970년대 미국은 대중매체를 활용한 광고산업이 대규모로 번성하던 시기였는데요. 키치함으로 무장한 채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정면으로, 또 도발적으로 내세운 크루거의 작품은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다국적 소비자본주의, 미디어 사회, 정보사회, 후기산업사회 등으로 당시의 미국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 미국은 폭발적인 소비문화를 자랑합니다. 이 배경에는 급격한 경제 성장과 기술발전이 근간이 된 풍부한 자본으로 많은 이들이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된 데 있는데요.



대량생산된 상품을 대중이 지속해서 소비할 수 있도록 유지하게 하는 장치가 곧 대중매체였죠. 다시 말해 대중매체가 대체 불가한 권력을 가지게 됩니다.

특히 텔레비전 방송국과 거대 광고회사가 이를 주도하였고요. (현재는 다국적 IT 회사, 영상과 소셜미디어가 우리 문화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당시 미국인들은 이미 텔레비전을 비롯한 대중매체의 시각 이미지에 광범위하게 노출되어 있었어요. 특히 소비와 관련된 상업 광고는 일상을 지배하는 이미지로, 사람들의 눈을 잠식해나가고 있었으니깐요.     


흥미로운 건 당시에는 텔레비전과 주류 광고로 대표되는 소비문화가 곧 80년대 미국을 상징하는 가치로써 여겨졌다는 거죠. 구매능력을 갖춘 대중의 자유로운 소비특권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이 소비문화가 부강한 미국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굳혀지게 됩니다.


미국을 상징하던 부유함, 그 자체였죠!     



이런 세계관이 미국을 잠식하던 시절, 크루거는 뉴욕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유명 잡지사 마드모아젤에서 디자이너로서 커리어를 쌓게 됩니다. 꽤 능력 있는 디자이너로 인정받았는지 이후 프리랜서로도 활동하면서 잡지, 책표지 디자인, 사진 편집 그래픽디자인 등으로 점차 활동 범위를 넓혀갔습니다.     


이렇게 잘 나가는 뉴욕 디자이너의 삶을 살던 그녀가, 왜 순수예술로 전향하게 되었을까요? 현재도 그렇지만, 세계 트렌드의 중심인 뉴욕의 명망 있는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를 쌓다가 말이죠. 접시를 닦아도 뉴욕 레스토랑에서 닦으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었자나요.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그것도 순수 예술의 최전선에서 주장하는 예술가가 될 수 있었는지는,

그의 성장배경을 들여다보면 좀 이해가 갑니다.


1945년에 크루거는 미국 뉴저지 뉴와크 지역의 중하층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흑인밀집지역으로 다양한 민족이 섞여있던 지역이었는데, 이때 겪은 환경 경험이 크루거가 사회비판적 시각을 갖게 하는 토양이 됩니다.


    

첫 예술공부를 1964년에 시라큐스 대학에서 순수예술 전공으로 시작했어요. 안타깝게도 부친의 죽음을 겪죠. 그래서 학업을 단념하고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기에 뉴욕 파슨스 스쿨에 등록해서 잠시 공부하다, 다시 그만두게 됩니다. 운이 좋게도, 당시 사진계의 거물 다이안 야니스, 패션계의 거물 하번스 바자의 그래픽디자이너이자 아트 디렉터였던 마빈 이스라엘로부터 사사받게 됩니다. 이들로부터 받은 경험은 크루거의 이후 작품세계에 걸쳐 큰 영향을 끼치고요.


순수예술계에 크루거가 다시 돌아온 시기인 1969년은 이전 시대의 개념미술이 이어지면서, 팝아트와 미니멀리즘이 강세로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남성 위주의 미술계 분위기에서 당시 여성 예술가에게 허용된다고 여겨진 예술 매체는 바느질, 직조, 뜨개질 등과 같이 여성이 가사 활동에서 다루던 영역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편견에 이미 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반발심을 품고 있었고, 페미니스트적 전복을 기대하는 여성예술가들의 연대가 점차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전문적인 상업예술을 경험한 크루거이기에 기존에 받아들여진 여성 예술가의 영역을 넘어선 언어와 시각요소를 결합하는 내러티브 아트나 전위적 퍼포먼스 예술을 시각화하는 것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직접 사진을 찍고 글을 따로 기입하는 시도로 작품을 보여주다가, 1979년부터 잡지나 광고사진 등에서 오려낸 이미지를 콜라주한 작품을 발표합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으로 예술작품에서 예술가 개인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할 수 있었죠. 그 위에 문단이나 단어를 결합하기도 하는데요. 대중적 명언, 정치적 문구, 광고 헤드라인 등을 차용합니다.      



1970년대 후반 크루거가 롤랑바르트 등이 제시한 기호학 등을 연구하는 예술과 언어(Art&Laguage)라는 그룹에 참여하게 됩니다. 자신의 주장을 견고히 할만한 주장을 이 그룹활동을 통해 접하게 되죠.     


1982년에 열린 카셀도큐멘타에서 독일 서부도시인 카셀시(Kassel) 전역을  <당신의 즐거운 순간순간들에도 군사전략 같은 치밀함이 있다 (Your moments of joy have the precision of military strategy)> 는 메시지로 온통 도배해 버립니다. 이러한 그의 파격적인 행보로 국제 예술계에 눈도장을 제대로 찍었지요.



마릴린 먼로의 유혹적 사진 위에 쓰인 글귀 보이시죠? <충분히 멍청하지 않다(Not stupid enough)>. 이 작품은 미국 대중문화에서 대중이 무방비적으로 소비하게 되는 여성이미지를 비판합니다. 일종의 대중매체가 가진 권력을 해체하고자 하는 시도지요.  특히, 이 사진과 문구는 여성을 스테레오타입으로 보는 사람들의 허점을 비꼬고 있습니다. 당시에 유행하던 백치미에 대한 표독스러운 저항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빨간 립스틱과 웃음은 마릴린 몬로를 상징하고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거지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스테레오타입의 여성이미지와 풍자적인 언어유희가 합성된 스타일이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군요.     


아마 크루거를 검색하면 가장 처음에 보실 수 있는 이미지일 텐데요.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Your body is Battelground)>가 1989년 탄생합니다. 여성 얼굴의 정중앙을 분할해서 반전효과를 주어 강렬하게 대비되는 이미지를 만들었죠. 그리곤 자신의 주장을 정확하게 발언합니다.


이 작품이 만들어진 계기가 있는데요. 크루거는 워싱턴에서 열린 여성 행진에서 낙태방지법에 항의하고 여성의 권리와 신체 자율성에 대해서 서슴지 않고 투쟁합니다.



"절단된 이미지 합성: 포토몽타주"


크루거 작품의 사진 기법을 포토몽타주(Photo Montage)라고 부릅니다. 1900년대 초반 다다이즘 예술가들이 콜라주 합성을 회화에 도입한 것처럼, 그는 사진 예술에 이러한 프로세스를 적극적으로 적용하였습니다. 일종의 지금 우리가 포토샵으로 만들어내는 사진 합성과 같은 거죠.      


정리하자면 크루거는 잡지, 광고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습득한 사진을 재료로 조작, 변형, 절단, 합성 등을 자유자재로 하는 편집기술로 독자(소비자)의 시선을 집중시켜 관심을 끌고, 내용을 빠르게 캐치하도록 하는 방법을 현대미술에 도입하였고요.



사진과 글의 결합이 대중에게 신속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의사소통 수단임을 간파하며, 시선을 사로잡는 이미지와 대중을 유인하는 광고의 화법까지, 아주 완벽하게 자신의 예술세계로 흡수하였습니다.


또, 구어체를 사용하고 광고에서 주로 쓰이는 I/We/You와 같은 인칭대명사가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특징이고요. 상업적 광고, 정치적 선전, 프로파간다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들이 사용하는 화법을 그대로 따라 하며 풍자를 곁들인 위트 있고 파급력 있는 작품을 생산합니다.


타임 스퀘어 전광판, 잡지, 옥외 간판 등 언제 어디서나 대중이 손쉽게 접하는 장소에서 그의 주장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며 전략적으로 발언합니다. 거대한 홍보물과 대량인쇄출판물처럼 야외에 있고, 일상에서 손쉽게 마주할 수 있는 미술관 밖의 매체로 대중과 소통하고자 한 것이죠.     

  

요즘 K-pop 광고등으로 각광받는 뉴욕 중심 한복판의 타임 스퀘어 전광판에 “대중을 향한 메시지”라는 제목으로, 부유함과 자본, 힘, 권력의 관계를 조롱하는 메시지를 추상적이고 권위적인 말투를 곁들여 송출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광고디자인에서 글은 이미지를 부가 설명하거나 강조하잖아요. 그런데 크루거는 글과 이미지가 충돌하도록 하는 역설적인 화법을 써요. 그러니깐 사람들이 뭐지? 하면서 다시 바라보게 되고, 어떤 해소를 시켜주는 게 아니라, 고민하고 자꾸 질문하게끔 부추겨요. 뭔가 찝찝한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광고의 막강한 파급력, 하지만 상업적이지 않은 광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면, 1987년 작품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적힌 카드를 조그만 손이 내밀고 있는데요. 이 모든 요소들이 너무나 함축적입니다. 현대 우리의 존재와 정체성이 생각(Thinking)이 아니라, 소비(Shopping)에 의해 결정되고 있음을, 또 그렇게 믿고 있는 소비자를 신랄하게 풍자한 거죠.     


이런 소비비판에는 단순히 대중만이 해당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예술 시장에 참여하는 미술계와 미술관, 미술 수집가, 미술 소비자에 대해서도 큰 반발심을 드러내는데요.


예술작품의 오리지널리티를 강조하면서, 이러한 작품의 우월성, 창조성, 독창성에 관한 과도한 개념을 부과하는 미술 조직을 비판하면서, ’ 미술관에서 위대한 예술가의 개념을 해체해야 한다 ‘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생산해내내는 오리지널 예술작품에 비싼 값을 매기고, 걸작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며 투자하듯 가격을 매기는 행위를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소비자의 구미에 맞추는 것에 급급한 ’ 미술시장‘이 가장 큰 자본주의의 일부라고 보았습니다.     


동시대 여성 예술가 작품과 구분되는 특징은, 예술의 영역이라고 불리는 표현 수단이나 공간 안에서 목소리를 낸 게 아니라,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관심 있는 이슈 현장에 직접 나서서 참여하기도 했고요.     



안전한 화이트 큐브(White Cube)로 대표되는 미술관을 넘어서 포스터, 전광판, 버스광고, 심지어 가방, 티셔츠까지 자신의 작품 이미지를 새겨 넣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최대한 더 크게 확산할 수 있도록 하는 대중매체 특성을 활용해서 대량 복제하고 배포했습니다. 그리고 대중의 근처인 일상에 다가가 대화하려 했고요.   

  


크루거가 작품의 관객으로 상정한 대중은 1940년대 이후 출생한 미국소비문화를 주도하던 세대였습니다. 이들은 텔레비전, 영화, 비디오를 보고자라 이미지를 읽는 데 익숙했지요. 타깃 한 대중에게 그의 메시지는 강하게 전달되고, 또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충돌하는 작품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관객을 사회비판에 참여할 수 있게 한 거죠.

단순히 사회 비판과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만 한 게 아니라, 보는 관객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여기까지 크루거의 작품을 살펴보았는데요.


20세기 초중반(사실 현재까지)  대량생산과 권력을 가진 대형 대중매체가 자본을 잠식하고 휘두르는 사회에서 스스로 능동적 소비자이고, 소비가 곧 권력이자 자신을 표현하는 정체성이라고 생각해 온 현대인의 오만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과정이 정말 경쾌합니다.


그럼에도 다시 패션브랜드에서 강렬한 빨간 박스와 헤드라인 문구를 오마주 하고, 이게 다시 오픈런과 리세일이라는 소비를 부추기는 현상을 낳는 걸 보면 아이러니하죠. 소비자를 유혹하고 구매 충동을 일으키는 상황은 크루거가 지향했던 비판적 메시지와는 점차 거리가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다시 이미지와 광고는 소비 그 자체, 또 중심에 서있게 된 거죠. 그래도 원작 작품을 이해하면서, 크루거가 부르짖고자 한 우리 시대의 오만과 편견에 공감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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