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럭서스(Fluxus) 운동 들어보셨나요?
현대미술 책을 읽다보면 자주 만나게 되는 단어입니다. 플럭서스 운동에 참여했던 유명 예술가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기도 하죠.
1960년대 초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전세계의 예술가를 끌어모은 국제적 예술 운동으로, 전후 아방가르드의 연장선상에 놓이면서도 독창적인 실험성과 철학을 제시했습니다. 일단 그들이 추구했던 정신으로만 보아도 유럽 구대륙과 북미 중심이었던 이전까지의 예술 운동에서 벗어나, 동양철학에 대한 큰 관심과 동양 예술가들도 어우러진 글로벌한 사유를 품고있었죠!
"Fluxus"라는 단어는 라틴어 fluere—흐르다—to flow—에서 유래했으며, 고정되지 않고 유동하는 예술, 장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걸 추구했습니다.
운동의 중심 인물은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였는데요.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아티스트였던 그는 건축, 음악, 디자인을 넘나드는 다학제적 인물로, 플럭서스의 조직자 역할을 수행하며, 다양한 예술가들을 하나의 네트워크 안에 연결하고 그 활동을 통합해내는 역할을 합니다.
1963년 뉴욕에서 “플럭서스 선언문(Fluxus Manifesto)” 발표하였습니다.
이 선언문에서 그는
플럭서스는 죽은 예술, 모방, 인공적인 예술, 추상 예술, 환영적 예술, 수학적 예술을 세상에서 몰아내려 한다. 플럭서스는 또한 ‘부르주아적 병폐’, 지식인 문화, 전문성과 상업화된 문화를 세상에서 몰아내려 한다. 플럭서스는 반(反)예술이다.
예술이 더 이상 고상하거나 순수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삶과 무작위성, 일상성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마키우나스는 플럭서스를 단순한 예술 경향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이자 유토피아적 공동체 지향의 움직임으로 드러내는데요. 그는 예술가들을 큐레이팅하고, 함께 출판물·퍼포먼스·이벤트를 조직하면서 플럭서스를 ‘운동’이자 ‘네트워크’로 만들어내는 큰 일을 해낸거지요.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악보 없는 음악, 우연의 요소, 파괴적 제스처, 언어 실험, 참여형 오브제 등을 동원하며 기존 예술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렸고요. 특히 텔레비전과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인 백남준이 참여하였고, 독일을 대표하는 예술가인 요셉 보이스는 ‘사회 조각(Social Sculpture)’ 개념으로 플럭서스의 정신을 확장시키는 새로운 작업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플럭서스는 기존 미술사 서술의 방식에도 문제를 제기했는데요. 그들은 완성된 결과물 대신 과정, 개념, 행위, 소통, 즉흥성을 중시했고, 이는 이후 프로세스 기반 예술 개념의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예술에의 참여를 촉진시켰습니다.
플럭서스는 단지 예술 운동이 아니라, 예술을 다시 정의하려는 철학적 실천이었고요. 그들은 예술을 삶의 일부로, 혹은 삶 자체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들을 보여줍니다. 고급예술이 지향하던 바와는 많이 다르지요?
이렇게 자유로운 예술적 사고를 지향하는 플럭서스는 예술과 정치, 공동체와 테크놀로지, 매체와 경험을 새롭게 연결하고자 했고요. 젊은 예술가들의 패기가 느껴지지않나요!
이후 20세기 후반부터 일어나는 동시대 예술의 여명이자, 새로운 예술을 할 수 있다는 응원을 실어준 레퍼런스로 여전히 회자되게 된거지요.
젊은 예술가들의 실험정신으로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예술의 재료(material) 자체를 바꾸는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종이, 악기, 언어, 가구, 음식, 몸…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었고, 중요한 것은 그것이 관객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가 주된 관심사였지요.
이렇게 열려있던 예술가적 정신은 기술 매체에 대한 개방성으로 이어집니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전기적 사운드’, ‘기계적 반복’, ‘무선 신호’, ‘카세트와 테이프’와 같은 당시로선 실험적인 테크놀로지를 적극 도입했고요, 이것이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를 예술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철학적 기반을 자연스럽게 형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플럭서스는 미술사적으로 개념미술(Conceptual Art), 퍼포먼스 아트, 인터미디어 아트, 비디오 아트, 소셜 프랙티스 아트 등의 기원이라 평가하는데요. 특히, 비디오 아트에서 이후 미디어 아트, 디지털 매체와 네트워크 기반 예술의 선구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예술가 바로 백남준의 이야기가 나와야겠지요!
그는 독일에서 활동하던 시절, 유럽 대륙 플럭서스의 핵심 멤버로 마키우나스와 협력한 예술가입니다. 사실 얼마 못가서 그들의 사이는 틀어지고, 플럭서스에서 제명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하지만요.
백남준은 플럭서스의 정신적인 스승인 존 케이지를 우연히 수업에서 만나, 오랜 기간 그가 찾아 헤맸던, 새로운 음악에 대한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우연성과 소리의 개념을 확장해나가면서, 마키우나스와 함께 우연성에 기반한 퍼포먼스를 행하면서 관객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죠. 그는 음악을 해체하는 테러리스트라고 스스로를 칭했습니다.
백남준은 뮌헨대학교의 클래식 인재였는데요. 독일 명장의 피아노를 요셉 보이즈에게 내려치게 합니다.
바이올린을 내리쳐 부숴버리는 퍼포먼스도 했지요.
그는 스스로를 칭기즈칸에 비유하며 “나는 황색재앙이다.” 라고 선언합니다. 유럽•서구 사회를 정복하겠다는 그의 기개가 느껴지요?
이토록 강한 자기 확신이 새로운 현대미술 장르인 비디오아트의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였겠죠? 그것도 한국인이 말이예요!
그의 첫 전시의 제목이 <음악의 전시> 이면서, 피아노를 박살내버린 것만 해도 엄청난 센세이션이었죠. 부순건 그것만이 아니라 바이올린도 있는데요, 후대 많은 예술가들이 오마쥬하는 존경받는 퍼포먼스 입니다.
텔레비전으로 새로운 예술을 제시했던 백남준은, 휴대해서 들고다니며 찍을 수 있는 소니 포터팩 비디오 카메라가 출시되자마자, 즉시 예술적인 매체로써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곧 그가 살았던 시대의 예술이자 근미래의 예술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죠.
그는 오랜기간 음악이 가진 한계성, 시간의 예술이라는 지점과 시각예술의 공간성을 결합한 새로운 예술을 비디오를 통해 형상화 할 수 있다고 믿었고, 곧 이를 현실화 하였습니다.
비디오 이미지를 조작하는 기술 개발 뿐만 아니라, "비디오 조각(Video Sculpture)"라는 새로운 개념을 미술계에 제시하였죠.
유명한 작품인 TV부처(TV Buddha,) TV첼로(TV Cello,) 마그넷 TV (Magnet TV) 등등 그는 비디오 영상 콘텐츠를 만듬과 동시에 하드웨어적인 외형까지 만들어내어, "비디오 조각"을 선사하였습니다.
그가 보여주는 비디오 아트는 설치, 퍼포먼스, 사운드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플럭서스의 상호매체성(intermedia) 개념을 정확하게 재현해낸 것이기도 하죠.
비디오 아트가 막 태동하던 1960~70년대, 영상은 대부분 모니터 속에서 보여지는 ‘2차원적 이미지’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예술과 같이 이미지를 담아내는 것에만 머물러 있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선구적인 예술가들은 이 모니터 자체에 주목하며 단순히 ‘보여주는 창’이 아니라, 하나의 물리적 오브제이자, 조각적 구조물로서 다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매체 자체를 어떻게 전시장 안으로 가지고 들어올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이러한 실험이 본격화되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비디오 조각(Video Sculpture)입니다. 여기서 ‘조각’은 전통적인 조각의 개념—형태, 물성, 공간 차지—을 계승하면서, 움직이는 영상이라는 시간적 요소를 통합하는 방식으로 확장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