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하고 불러봤던 기억은 안 나.
할머니의 목주름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하고 불러봤던 기억은 안 나.
그래서 낯설고 어색한 이름이지만 다정하게 불러봐.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 내 가슴에 오랫동안 따스하게 머물러 있는 것은 바로 할머니의 목주름 때문이야.
할머니의 말랑하고 부드러운 목주름을 만지고 있으면 난 스르르 잠이 들었어.
단잠을 방해하는 손녀의 불편했을 손길에도,
싫은 내색 안 하시고 당신의 품으로 나를 바짝 끌어안아 주셨지.
한겨울에 따뜻한 햇볕이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면,
마음이 아늑하고 편안해지는 것처럼 할머니의 목주름은 내게 포근한 햇살이었어.
엄마가 없어 늘 불안하던 조그만 아이에게는 가장 안전한 곳이었을 거야.
할머니!
내 나이 5살쯤. 할머니와 방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지.
갑자기 쿵 소리가 나며 할머니가 내 옆에 쓰러지셨어.
나는 황급히 아빠를 불렀고
아빠는 부엌에서 숫돌에다 낫을 갈고 계셨던 건지
낫을 든 채로, 급하게 뛰쳐나오셨어.
얼음처럼 굳어있던 아빠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떠올라.
그날, 나는 엄마 같은 할머니를 잃었고
아빠는 당신의 우주인 엄마를 잃었어.
할머니!
할머니가 더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만이라도
내가 중학교 때까지 만이라도
그러면,
나는 엄마가 없어서 겪어야만 하는 아픔의 가짓수가
많이 줄었겠지.
그러면,
아빠는 덜 방황하셨을지도 모르겠어.
일하고 난 뒤 엄마가 있는 따뜻한 집을
정다운 마음으로 오시지 않으셨을까.
그런 나와 아빠를 두고 가는
할머니의 발걸음이 참으로 무거우셨겠지.
할머니가 내 곁에 오래 살아계셨다면
할머니와 좋은 곳으로 여행도 하고
예쁜 꽃분홍 스웨터도 사드리고
어깨, 다리도 살갑게 주물러 드리면서
때마다 용돈도 넉넉히 드렸을 텐데....
할머니가 나를 많이 걱정하며
애틋하게 키웠다는 것을 작은엄마한테 들었어.
엄마가 없던 자리에 엄마가 되어줘서 고마워.
할머니!
나는 자라나면서 어른들을 많이 원망했었어.
아빠, 엄마, 이웃분들, 친척들....
모든 사람이 나를 방치했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래서 내가 어른이 되면 어려운 사람을 돌보고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어.
근데 지금 나의 모습은 어린 시절 상처에 묶여서
몸만 커버린 어른이 되어버렸지.
할머니!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 울고 있는 아이든,
길을 잃은 노인이든, 작은 생명까지도
살피는 의미 있는 여생을 살아가고 싶어.
그래야 내 깊은 상처가 아물어
그곳에 예쁜 꽃이 필 것 같아.
그 꽃은 할머니 머리에 곱게 엮어 줄게.
예쁜 새 신부처럼....
그때까지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