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처럼 환하게 피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어느 일요일이었다. 자궁근종으로 개복 수술을 받은 지 한 달 남짓,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아 움직일 때마다 복부가 찌릿하고 뻐근했다.
당시만 해도 미혼 여성에게 자궁 근종 개복 수술은 드물었고 내가 그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은 깊은 수치심과 우울감을 안겨주었다.
몸도 마음도 무너진 채 나는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 몸이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듯했고 마음은 더 무거웠다. 어린 시절 비 오는 날 동네 언니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듣고 느꼈던 찝찝하고 불쾌한 감정이 다시 떠올랐다.
간신히 외출을 마치고 돌아와 방에 들어서자, 어지럽혀진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옷걸이엔 옷이 너저분하게 걸려 있었고 텔레비전과 장식장 위에는 먼지가 소복히 쌓여 있었다. 수술 후 몸이 불편해 청소를 하지 못한 탓이었다. 긴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치우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아 누울 자리만 대충 쓰고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전화벨 소리에 눈이 번쩍 떴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30분쯤이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이 경찰이라며 아빠가 교통사고로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고 했다.
얼마나 다치셨냐고 묻자, 경찰은 병원 전화번호만 알려주며 직접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심각한 사고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간호해야 한다는 부담, 회사에 양해를 구해야 하는 눈치, 서울까지 두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까지…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문득 ‘아빠는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스쳤다.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빠의 상태를 묻자, 전화를 받은 이가 잠시 횡설수설하더니 급히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그 몇 초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잠시 후, 다른 사람이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몸이 얼어 붙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현실감이 사라져 정신이 아득했다. 아빠 없이 나혼자 살아야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무서웠고 불행한 내 신세가 서러워 목 놓아 울었다.
전날 아빠는 외박하셨다. 먼 친척의 환갑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친하게 지내던 다른 친척 집에서 주무셨다.
사고 난 날 아침, 아빠는 전화를 걸어 말했다.
“ㅇㅇ아, 친척 잔치 다녀올게. 아침은 밥 비벼 먹어.” 유난히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나는 잠결이라 대충 “어어”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 말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빠의 얼굴은 늘 어둡고 침울했다. 불행했던 삶이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런데 염을 마친 아빠의 얼굴은 마치 꽃처럼 환히 피어 있었다.
뽀얀 얼굴, 편안한 표정. 믿기지 않을 만큼 고왔고 평온해 보였다. 나는 조심스레 아빠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아빠, 형벌 같던 삶을 마치셨으니, 이제는 홀가분하게 떠나세요.”
우리 집 쪽엔 친척이 드물어 친척집 경조사 가면 늘 허전하고 쓸쓸했지만 아빠의 장례식장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회사 사장님은 외국인 직원들까지 데리고 오셨고 교회 교인들, 고향 친구들, 내 친구들까지 늦은 밤까지 곁을 지켜주었다.
평소엔 늘 혼자라는 고립감 속에 살아왔지만 그날은 수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눈빛과 위로가 내게 향하고 있었다. 가장 슬픈 날이었지만 이상하게 슬프지만은 않았다.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와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나는 깊은 감사와 위안을 느꼈다. 아빠는 아마도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 쉽게 발길을 떼지 못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보시고는 조금은 안심하셨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삶을 살았지만 사람을 참 좋아하셨던 아빠. 그런 아빠의 마지막 길을 함께해 준 이들이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아빠와 함께한 수십 년 동안, 하고 싶었던 말들을 꾹꾹 눌러 삼켰다. 그 말들은 갈 곳을 잃고 내 안에 켜켜이 쌓여 돌처럼 굳어버렸다. 원망의 말이 많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도 함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언젠가 아빠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죽어 있던 말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날 거라고.
“아빠, 고맙고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