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애'와 '인간에 대한 환멸'은 공존한다. 감성과 이성이 공존하며 분리되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갈등하듯이...
인간애와 인간에 대한 환멸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갈등하며 멀어지고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는 것이 삶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아저씨 박동훈'에게서, 그리고 '인간애'로 가득한 후계동 동네에서 지안은 사람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회복하지만, 그 후로 어떤 것과 만나느냐에 따라 다시 또 세상에서 등을 돌리게 될 수도 있을 거다.
좀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내가 펑펑 울었던 몇 장면들이 기억나는데...
그중에 가장 기억나는 건 카뮈의 <페스트>를 읽었을 때 탈출하려던 랑베르가 리유의 태도에 감명을 받고, 오랑시에 남기로 결정하는 장면에서였다.
사랑하는 연인에게로 가기 위해 전염병이 도는 오랑시를 떠나려고 시종일관 노력했는데, 결정적으로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랑베르는 리유 일행과 남아 그들과 '연대'하기로 결정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났었을까? 궁금했는데, 그 순간이 나에게도 '인간애'를 회복해 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후계동에서 지안이 느끼는 감정도, 지안이 흘리는 눈물도 그와 비슷한 종류가 아니었을까?
오랫동안 나는 '아저씨들'이 싫었던 것 같다.
책에서조차도... 책에 묘사된 것이 '여성'에 대한 작가 자신의 시선으로 느껴져 김훈, 조정래 같은 작가들을 특히 더 싫어했을 정도로...
'인간에 대한 환멸'이 느껴지는 몇몇 순간들을 경험하면서, 모든 '인간'이 싫어졌던 것 같기도 하다.
관계는 아이 학부모들 같은... 같은 성별을 가진 사람들로만 한정했다.
어떤 것도 나를 침해하지 않도록 울타리를 치고, 성벽을 높게 두르고...
'나를 위한 글쓰기' 이후 글을 쓰면서였는지,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의 반성이었는지, 시 이어쓰기를 하며 '시의 감성'을 깨우고, 음악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 가던 것과 같은 흐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나는 사람들에게 많이 열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을 회복했다고 생각했다.
편안함에 이르러... 지안이 동훈에게 "제가 밥 살게요. 아저씨 맛있는 거 한번 사주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전화할게요"라고 말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듯이...
'후계동의 아저씨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지듯... 나에게서도 그렇게 '인간애'가 회복된 것 같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아저씨들'과 같이 밥 먹고, 차 마시고... 심지어 술 먹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정희네'의 분위기가 그렇듯이...
사람을 차별하고 싶지 않지만... 세상의 많은 '아저씨들'은 여전한 것 같아 싫은데...
'나의 아저씨'에 나오는 아저씨들만이 유독 사랑스럽게 보이는 건 역시 가상의 동네에서만 존재하는 '판타지'였기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그동안 도서관에서 만났던 '아저씨들'은 나를 많이 회복시켰던 것 같다.
특히 같이 글쓰기 모임을 하는 ㅂㅅ님에 대해서는...
스스럼없이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유명한 시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구별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가며 인간적으로 잘해주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느끼고, 많이 배우면서...
삭막한 세상에서
편안하게 '밥 먹자'는 말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도하게 선을 넘지 않으려고 애쓰는... 지나치게 예의 바른 관계들 속에서 점점 마음 놓고 편안해지도록 분위기를 마련하지만 지나치지 않은 적정한 선을 지키며...
그렇게 나에게도, 인간에 대한 애정을 회복해 가도록 하는 데 드러나지 않게 많은 역할을 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나도 상대가 '아저씨'더라도 스스럼없이 '밥 먹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아저씨'에 대해서만 유독 더 선을 긋지 않을 만큼 이제는 조금 회복된 것 같은 나의 변화에 대해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런 나의 변화를 즐겁게 이야기했는데... 동네 아는 엄마에게서, "이 언니 조만간 바람나겠네..."라는 말을 듣고 또 한 번 '현타'가 왔었다.
아... 맞다...
세상은 '후계동'이 아니라, '성희롱', '성추행'... 이런 단어들로 난장판이 되어버린 것 같은... 그런 곳이었지...
그런 곳에서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았다가는 그 틈이 오해를 사고, 약점이나 허물이 되어버리고 말 것 같은...
그래서 아저씨도 처음에 지안과 '밥 먹는 것'도 이런저런 말이 날까 봐 불편해했던 거였다.
'관계'란 무수한 가능성을 품고 있기에 물론 인간애에 이끌려 어쩌면 '사랑'까지 갈 수도 있겠지만, 한 단어로 단정하고 규정지을 수 없을 텐데... 단순히 밥 먹는 장면 하나가 사진 찍히듯 누군가의 시선에 찍혔을 때, '관계'가 형성되기 전조차도 이미 '불륜'이라던가 '바람'이라는 언어로만 낙인찍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그런 '시선'의 위험성, '언어'로 이름 지어져 뭐가 있기도 전에 미리 더럽혀질지도 모르는 위험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모든 관계의 가능성, 모든 '후계동', 모든 '인간애'의 가능성마처 차단하고 살지 않았을까...
'인간애'의 환상을 무참히 깨버리는 '언어들'이 분명 존재하기에...
인간에 대해 열리려고 하는 마음조차 황급히 닫아버리고 어떤 시선이나 어떤 말이나 어떤 오해로도 훼손되지 않도록, 중무장을 해야 했던 것 아닐까...
지안의 '밥 좀 사주죠'라는 말은
보는 사람의 시선, 생각, 경험, 상황들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을 건데...
극 초반에 벌레 한 마리 못 죽이던 동훈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마음에 걸리는 게 없으면 뭘 죽여도 문제없어. 마음에 걸리면 벌레만 죽여도 탈 나."
마음에 걸리는 게 없으면 누구랑 밥을 먹든 사실 아무 문제가 없을 거다.
그래서 마지막에서야 두 사람은 "편안함에 이르러" 이제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판단받을 필요도 없이,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할 필요도 없이 그저 밥 한 번 사드리고 싶은 마음, 반가운 마음, 인간애와 신뢰감으로... 스스럼없이 전화하고 약속해서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걸까...
오히려 잃을 게 없었던 지안은 아저씨이든 회장님이든 누구와도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을 수 있었는데...
'안전'을 생각하는 구조기술사 동훈은 상대가 지안이든 회장님이든 '밥 먹는 일' 하나조차도 어렵게 생각하다가, 역할과 의무만이 남아 생명력을 잃고 거의 다 죽어가던 마음이 지안으로 인해 다시 '살게 되어' 누군가와 '밥 먹는 일'도 '위험한 일'이 아닌 그저 살아가는 일로 여길 수 있게 된 걸까
어릴 적엔 뭣도 몰라서 돼지도 죽였다는데... 어른이 되어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아 벌레도 못 죽이던 동훈은...
이제 마음에 걸리는 게 없어질 정도로 편안함에 이르게 된 것 아닐까...
나는 애써 편안해진 마음과 다시 불편해지는 마음 사이를 여전히 오락가락하고 있는 것 같다.
(2024. 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