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회인과 김치 (1)
원래 지나가면 다 눈곱처럼 작은 일로 여겨지곤 하지만, 당장 닥쳤을 땐 큰일처럼 여겨진다.
특히나 나는 문제에 대해 확대경처럼 비추면서 혼자 심각하게 미리미리 걱정하는 성격이었다. 다 지나고 보면 별게 아닐 때도 있는데 말이다.
일례로, 이전에 학부 재학 시절 중 한 학기에 회계관련 과목 3개에서 트리플 씨플 학점을 획득한 적이 있다. 안 그래도 회계쪽에 약했는데, 수강신청 실패로 영어로 듣는 전공 심화 회계를 듣기도 했고, 세무회계도 한 꺼번에 듣는 처지가 되었었다.
그때의 난 꼬박꼬박 도서관에 나가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공부했던 것 같은데. 타고난 수포자 머리탓인지, 단순암기에 강한 이해력 낮은 타입이었는지 결국엔 트리플 씨플로 그 학기를 마무리했다.
기대를 안 하기는 했다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선택과 집중이 다 틀렸는지, 그런 결과를 받았다. 괜스레 슬픈 마음에 혼자 동네의 언덕에 올라가서 울먹거리며 친한 친구한테 전화했던 기억이 난다(지금 돌이켜 보면, 그리 큰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은 친구하고 돌이켜 웃긴 얘기로 회상하곤 한다.)
지금은 볶음 김치라던지, 샐러드라던지, 나물이라던지 어느 정도 먹지만. 여전히 난 생김치를 먹지 못한다. 그리고 이 사실은 내가 성장하는 내내 하나의 걸림돌이었으며, 나의 약점이었다.
마법소녀가 자신의 마법을 숨기고 싶어하는 것처럼, 난 내가 김치를 못 먹는다는 사실을 항상 숨기고 싶었다. (마법소녀는 힘을 숨긴 짱 쎈 사람이었지만, 난 편식을 숨긴 사람이었다는 점이 다른가?)
특히 초면인 사람들에겐 숨기고 싶었다.
내겐 오래된 대학교 친구들이 있는데, 이 친구들과 8학기를 동고동락하며 보냈다. 학식도 먹고, 대학로에서 밥도 사먹고, 술도 먹고.
그러다 알게 된 지 2년인가, 3년 만에 밥을 먹다가 문득 어떤 일이 있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그때 난 처음으로 '김밍 아웃'을 했다. 생김치를 먹지 못한다고.
그땐 친구들의 놀랐던 얼굴이 떠오른다. '왜 못 먹어?'라기 보단, '진짜? 몰랐네?'라는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게, 친구들과 밥을 먹으면서 크게 티나게 편식을 한 적은 없었다. 곱창을 못 먹는 것도 아니었고, 회를 못 먹는 것도 아니었고, 샤브샤브를 못 먹는 것도 아니었고, 김치 볶음밥을 못 먹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젠 고작해야, 학식에서 김치를 밑반찬으로 안 먹는 것 뿐이었다.
어릴적엔 야채라면 일단 거부하고 봤지만, 크면서 아예 야채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크면서 취향이 바뀐 것인지는 몰라도.
어느 순간에는 양파가 맛있었고, 양배추가 맛있었고, 구운 마늘이 맛있었다. 회도 아예 안 먹어서, 초밥 조차 입에 대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다. 그리고, 특히 마늘도 별로 안 좋아했는데, 마늘이 기초가 되는 알리오올리오라는 오일 파스타가 너무 맛있었다.
이처럼 크면서 식습관, 취향이 바뀌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고수를 먹지 못하듯, 난 생김치 특유의 향과 맛을 싫어했다. 이건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거였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신경조차 쓰지 않을 문제로 난 항상 약점처럼 숨기면서 산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마트에서 판촉행사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보통 오후의 시간대에 와서, 저녁까지 그곳에서 먹게 되는데. 보통 마트의 직원 휴게실 안에는 따로 구내 식당이 있다.
그곳에서 마트 직원분들이 식사를 하시는데, 판촉일을 하시는 엄마 또래의 이모님들이 참 많았다. 그래서 아무래도 챙겨주려는 마음이 큰데, 구내식당에 급식 반찬이 부실하게 나오는 날이면. 직원분들은 집에서 반찬을 싸오셔서 함께 먹기도 했다.
그리고, 나 역시 또래의 친구와 먹기도 하고 때론 혼자서 먹기도 했는데. 도시락을 싸오기도 하고, 구내식당 밥을 먹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곳에서 저녁을 먹는데,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집의 김치가 잘 익었다고 맛있다고 하시며 다른 분들과 나누어 드시다가. 내가 눈에 밟히셨는지, 김치를 나눠주려고 하셨다.
“전 괜찮아요. 저 김치를 안 먹어서요.”
그리 거절을 했는데.
“김치를 못 먹어? 외국인이야?”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분께선 딱히 나를 비꼬려거나, 비방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한국에서는 보통 김치를 전통음식처럼 먹는 게 당연해서, 그래서 신기함 반 의아함 반을 담아 별 생각 없이 하신 말씀이었겠지만. 그 말이 오래도록 남았다.
나중에 직장에 가서도 이렇게 한 소릴 들으려나. 또 생각이 많아지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미 초중고를 거쳐 한국인의 김치 사랑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여전히 적응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억울해지기도 했다. 채식주의자한테 고기를 왜 안 먹느냐고, 한국인 아니냐고. 그리 말하는 사람도 없고. 향신료인 고수, 마라를 못 먹는 사람한테 왜 못 먹냐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지만,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연히 입 밖에 내진 못했다.
웬만하면 못 먹는 음식은 숨겨야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다, 인턴을 시작하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