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회인과 김치 (2)
어릴 적의 난 내가 김치를 못 먹는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 그리고 숨겨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생각보다 살아가는데, 남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어서 상관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그나마 괜찮지만.
2N 년을 통틀어 가장 큰 약점은 한국 사람인 내가 김치를 먹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항상 작은 문제가 발생하면, 그게 일생일대의 문제인 것처럼 먼지 만 한 문제도 지구만 한 문제로 보곤 했다. 그러니 10대 때는, 모든 생각이 나의 약점 김치로 귀결됐다.
“넌 음식을 좋아하니까, 영양사 하면 어울리겠다.”
“아니, 내가 김치를 못 먹는데. 무슨 식품영양학과야. 영양사 못 해.”
이런 진로에서부터 시작해서,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부모님을 뵈러 갔다가 김치를 못 먹어서 헤어지면 어떡하지. (남자친구도 없었는데, 무슨 걱정을 이렇게 했는지 의문이다.)
사회생활 할 때, 직장에서 같이 밥을 먹는데 동료들이 내가 김치를 못 먹는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하지? (다들 서로 밥 먹기도 바쁘다.)
이런 쓸데없는 고민들도 많이 했었다.
지금 와서 보면, 그때 닥치면 어떻게든 해결 날 일들이었는데 말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우연히 좋은 기회를 얻어 인턴을 하게 된 적이 있다. 무릇 사회인이라면 알겠지만, 구내식당에서 알아서 배식해 주는 점심만큼 편한 것이 없다.
점심시간마다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금세 밥을 먹을 수 있으니까. 내가 인턴을 하던 곳은 구내식당도 있었고, 간식이 넘치고, 커피 머신까지 있는 멋진 탕비실을 갖춘 곳이었는데. 나중에 꼭 구내식당과 탕비실 좋은 곳으로 취직해야지, 하고 생각하게 만들어준 곳이었다.
10대와 20대를 거치며 친밀하지 않은 사람과 급식을 자율 배식으로 먹을 땐, 그릇에 꼭 김치를 담았다. 어른이 돼서 김치를 좋아하게 되었느냐고? 아니다. 여전히 생김치는 못 먹는다. 그저, 내 급식판을 보고 김치를 먹지 못하느냐는 지적을 듣는 걸 피하고 싶어서였다.
내겐 익숙한 것이 타인에겐 지적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그간 여실히 배워온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인턴 생활을 하면서도, 일부러 조금씩은 김치를 담곤 했다. 그러다가 생각보다 다른 분들이 내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깨달은 적이 있다. 그 이후에는 잔반을 만들지 않기 위해, 더 이상 먹지도 않는 김치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분은 내가 김치를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 안 먹는구나-.'하고 넘어가기도 했다. 그간 내가 겪어온 지적이 무색하게도, 생각보다 이곳의 사람들은 타인의 식습관에 무디기도 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인턴 동기가 있었는데,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친구였다. 그 친구는 키도 크고, 예쁘고, 시원시원한 성격을 갖고 있는 친구였는데. 한 가지 특이점은 오이를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이전에 함께 식사를 할 때, 오이를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오이를 싫어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거리낌 없었다. 물론, 내가 김치를 안 먹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그러다 어느 날, 모두 다 함께 회식을 한 적이 있었다. 숯불 갈빗집에서 회식을 했는데, 후식으로 상사분께서 냉면을 시켜주셨다. 그때 그 친구는 식당 직원 분께 오이를 빼달라고 부탁드렸고, 그러자 옆에 계시던 다른 선배님도 본인도 오이를 싫어한다며 오이를 빼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난 그 모습이 신기하고 와닿았던 것 같다.
난 못 먹는 음식에 대해 저렇게 쉽게 말해 본 적이 없는데, 저 친구는 그걸 말할 수가 있구나.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생각보다 신경을 쓰지 않는구나. 음식의 종류 차이일까. 그래도, 잘 못 먹는 음식에 대해 말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은 잘 안다.
그날은 내가 못 먹는 음식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을 달리할 수 있는 날이었다.
무언가를 못 먹는다고 해서, 그게 큰 약점이 되질 않을 수 있구나.
그냥 내 마음과 태도를 좀 더 당당히 해도 되겠구나, 그리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