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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울림 Oct 22. 2023

어쨌든 잘 삽니다.

마치는 글

아주 어렸을 땐 매운 걸 잘 못 먹었다. 그래서 라면을 정말 좋아하는데도, 하얀 국물인 사리곰탕면을 먹었고, 그러다 좀 머리가 크고 나서는 안성탕면과 진라면 순한 맛.

그리고 매운걸 좀 먹는다 싶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는 신라면을 먹을 수 있게 됐다.


고등학교 때는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공부하는 야자가 쭉 이어졌다. 그때 잠을 쫓아내려고 달달한 믹스커피도 많이 먹었고, 편의점의 달달한 캐러멜마끼아또 커피도 많이 마셨다. 하지만 그 시절 내 입에 쓰기만 했던, 탄맛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도무지 입에 맞질 않았다.

맛없는 아메리카노를 먹어서 그런 걸까? 아니었다. 지금 맛있게 마시는 초콜릿향 나는 고소한 원두로 내린 아메리카노도 그 시절에는 맛없게만 느껴졌다. 달지도 않고, 그냥 애매한 쓴 맛이 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학생이 되고 나서, 갓 스물일 때까지만 해도 먹을 줄 아는 커피라곤 여전히 캐러멜마끼아또뿐이었는데. 어느 순간엔 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그렇게 좋아하고 있더라.


기억도 나질 않는 순간에 이미 좋아하고 있었다. 입맛이 바뀐 걸까. 아님, 그 오묘한 쓴 맛에 중독된 걸까. 아무튼 요즘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케이크를 곁들여 먹는 걸 좋아한다.


이처럼 기억도 안 나도록 내 편식 음식의 범주도 점점 바뀌어 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는 안 먹던 샐러드를 좋아하게 되었고, 마늘, 양파, 상추, 회, 볶음 김치 이런 것들을 좋아하고 있었다. 아직도 생김치는 못 먹지만 말이다.

어릴 때만 하더라도 싫어하던 음식을,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다. 입맛은 계속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사실 김치를 못 먹으면서 생겼던 유년기의 에피소드를 한 번은 꼭 써보고 싶다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몇 년을 망설였고, 실행은 생각보다 쉽질 않았다. 평생을 숨기고 싶어 했던 나의 식습관을 글로 남기다니.


한국인이 고수를 못 먹을 순 있지만, 김치를 못 먹는다는 건 관심을 받게 되는 일이니까.

아무리 세상이 다양성을 존중하도록 바뀌었다지만, 사람들이 내가 김치를 못 먹는다고 비난하면 어떡하지?

한국인이 김치 못 먹는 게 자랑이냐고, 말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한참을 망설였다.


때론 펜이 칼보다 강하다, 그런 말이 있질 않나. 이야기를 써서 기록을 남기는 건 참 어려운 것 같다.


그럼에도 써보는 건, 생각보다 김치를 못 먹는 사람이 나뿐만 아니라 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이기도 하다.


재밌게 보던 인스타툰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인스타툰 작가님은 '김치 헤이터'라고 고백하며 자신이 김치를 못 먹게 된 계기에 대해 그려놓은 툰을 본 적이 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할 수도 있는 거구나. 신기한 마음과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한국인이 김치를 못 먹는다고 비난하면 어쩌지. 걱정하던 게 무색하게도, 댓글에는 생각보다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다. 나처럼 김치를 못 먹는 사람들. 편식하는 사람들.

다들 말을 안 하고 있던 거지. 그리고 그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해서도, 그리고 다른 것들에서도 김치를 못 먹는다는 사실이 이젠 큰 걸림돌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생각보다 회식 메뉴 중 내게 걸림돌이 되는 건 없었다.)


그래서, 나도 김치를 못 먹어도 어쨌든 잘 살아가고 있다고. 그런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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