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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울림 Oct 27. 2024

행복과자점 20화

10. 선물     



새벽부터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걸 보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직감하며 설렜던 것이 무색하게도 점심시간쯤을 지나가면서 눈이 멎었다.     

“올해도 다 지나갔네.”     

운은 벽에 걸린 달력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한 해의 시작은 항상 그해 연도 숫자가 어색하지만, 끝에 가서야 겨우 익숙해졌다. 또 어색한 새해가 오고, 낯선 나이가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이브에는 평소처럼 가게를 열었고, 생각보다 타지에서 방문한 손님들이 많아 바쁘게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문을 닫고, 영화를 보다가 소진이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다.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소진은 이브에도 야근하는 중이라며, 이를 악문 목소리로 말하다가 자신에게서 선물 받은 빵들이 너무 맛있었다고 재잘거리다가 끊기 전에는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잊지 않고 외쳤다.

그 인사말에 운은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서 나긋하게 웃고는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저녁에는 소율이네 집에서 파티하기로 했으니까, 그녀는 가져갈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가까운 도시에 미리 주문해 두었는데 그걸 가지러 가야 했다.     

“김윤오는 뭐 하고 있으려나.”     

약속은 저녁이었으니까. 운은 어쩐지 연휴를 맞아 붕 뜨는 마음에 그가 떠올랐다. 그녀가 망설임 없이 휴대폰을 꺼내 윤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 왜, 유운?     

스피커 너머로 넘어오는 무겁게 잠긴 낮은 목소리지만, 운은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냥 넌 언제 갈 건가 해서.”

- 난 좀 늦을 거 같은데. 형한테 부탁받은 것도 있고.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

- 아, 지금 일어나서……. 아무튼 너 먼저 도착하겠다. 나 마트 들렀다 갈 건데, 뭐 필요한 거 있어?

“없는데.”     

운은 그렇게 대꾸하며 온종일 맑을 예정인 하늘을 응시했다. 모처럼 이곳에서 맞는 크리스마스니까 하얀 눈이 내리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에게 대꾸했다.     

“…눈. 눈이 필요한데. 크리스마스니까.”

- 눈?     

따라서 되묻는 그에게 됐다며 전화를 끊곤, 모처럼 노트북을 열었다. 지난번에 도영이 블로그 이웃을 맺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영이 종이쪽지에 남겨놓은 블로그 주소로 들어가니 평소 도영이 읽은 책의 독후감 그리고 사진과 이모티콘이 뒤섞인 주간 일기 카테고리에 게시글이 꽤 쌓여 있었다. 

스크롤을 더 아래로 내리자, 도영이 하고 있다던 취미 중 하나인 뜨개질 사진들도 종종 보였다. 찍어놓은 뜨개질 완성작 중에서도 선물 받은 털실로 뜬 세잎클로버 열쇠고리가 단연 눈에 띄었다. 그 사진을 보다가 운이 힐긋 자신의 트리를 바라보았다. 트리에 참처럼 매달아 놓으니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한창 도영의 블로그를 구경하다가 운은 드디어 자신의 블로그 창을 열었다. 새것처럼 깨끗한 블로그 창. 중학교 때, 이것저것 일기처럼 게시글을 쓰기도 했었는데. 대학생 때 발견하고 흑역사라 여기며 삭제한 탓에 게시글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의 블로그는 백지상태였다. 오랜만에 텅 빈 블로그 앞에 서자, 그때 괜히 다 삭제했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지금 읽어봤으면 추억처럼 보였을 텐데. 비공개를 바꿔서 그냥 둘걸.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뒤늦은 후회였다. 운이 마우스 휠을 내리며 휙휙 둘러보다가, 게시글 작성 버튼을 눌렀다.

또 새로운 백지.     

“…뭘 써야 하지.”     

운이 골똘한 눈으로 하얀 여백을 지긋이 응시했다. 무슨 내용을 써야 할까. 고민하며 눈을 굴리다가 겨우 키보드에 다시 손을 얹었다. 그리고 첫 글을 뗀 아이처럼 서툴게 글을 적기 시작했다.     

[행복과자점 일지 1日]     

타닥타닥. 키보드 위에서 놀리던 손이 잠시 멈추었다. 그러다 운은 다시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행복과자점 주인입니다.]     

“…뭔가 어색한가.”     

그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타닥타닥 백스페이스키를 연타했다. 그렇게 다시 썼던 글을 지웠다가 다시 썼다가를 반복하길 여러 번. 이내 갈피를 잡았는지 방금까지완 다르게 쭉쭉 글자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      

벌써 한 해의 끝자락처럼 느껴지는 크리스마스 날이에요.

저는 지난 한 주 동안 크리스마스 준비를 월동 준비처럼 하면서 꽤 설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충분히 설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셨다면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타자를 뗀 운은 이제야 겨우 손이 풀렸는지, 이제 별 머뭇거림 없이 글을 마저 이어갔다.     

[크리스마스는 참 신기한 것 같아요. 

1년에 한 번뿐인 날인데, 그날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어렸을 때도, 그리고 어른이 된 지금도. 어린아이처럼 설레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또 막상 지나버리면 금세 식어버리는 기분이 들어요. 고작 크리스마스에서 하루만 더 지나가 버려도요. 

하지만 기다리는 것만큼은 두 달 전부터라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면서, 먼 날짜를 세면서 기다리는 게 좋더라고요. 

좋아하는 캐럴을 듣는다든지, 오랜만에 해리포터를 몰아보는 계획을 짠다든지. 그런 단순한 것들 말이에요.

그리고 크리스마스트리를 하나둘씩 내놓는 거리, 그리고 백화점, 카페, 가게들을 구경하는 일들 말이에요.

그런데 올해는 제가 크리스마스트리를 다른 분들께 보여주려고 내어놓았다는 게 색달랐어요. (조금 늦게 내놓은 감이 있지만요!)

여러분은 크리스마스 케이크로 뭘 준비하셨을까요? 

전 이번에 처음으로 부슈 드 노엘이라는 케이크를 예약해 봤어요. 크리스마스 파티에 가서 나눠 먹어보고 싶었거든요. 

그럼, 다들 행복한 성탄절 보내시길! :) ]     

이렇게 써도 되겠지. 운이 뒷머릴 긁적이며 블로그 글을 대충 오탈자는 없는지 읽어 보고는 행복과자점의 트리 사진을 함께 업로드해서 등록 버튼을 눌렀다.

늦었지만 올해의 첫 게시글이었다. 

누군가는 이 글을 읽으려나,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정말로 케이크를 찾으러 갈 시간이었다.     

***     

운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결 익숙해진 주택의 마당에 들어섰다. 열려있는 대문 너머로 이전과 달리 북적거리는 것처럼 마당에는 캠핑용품이 잔뜩 늘어져 있었다. 한편에는 녹색 텐트가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눈처럼 하얀 천막 아래로 널따란 간이식 테이블과 의자가 보였다.     

“사장님! 일찍 오셨네요-.”     

활기찬 남자의 목소리에 시선을 옮겨 주택의 현관문 쪽을 바라보자, 서준이 마당에 세워져 있는 천막과 같은 재질의 천을 품에 한 아름 안고 걸어오고 있었다. 운이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늘 캠핑하시는 거예요?”

“아아-. 이거요. 멀리는 못가지만 놀러 온 분위기 내면 좋을 거 같아서-. 소율 엄마가 번거롭지 않겠냐고 했는데, 내가 고집 좀 부렸죠. 뭐. 그래도 크리스마슨데 애들한테 기억에 남는 추억이어야지-.”     

서준이 그렇게 말하며 들고 온 흰 천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고는 허공에 펼쳐서 탁탁 털고서 천막의 끄트머리에 고정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하기 어려워 보여 일손을 거들려고 했지만, 그는 이런 것쯤은 금방 한다며 극구 거절했다.

그 말처럼 생각 외로 수월하게 한 면에 두른 천을 시작으로 금세 사방에 다 설치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천막의 입구를 만들 듯이 한 면의 천은 둘둘 감아올려 윗부분에 고정했다. 천막의 사방을 두르고 나니 겨울의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는 모양새였다.

그녀가 어정쩡하게 제자리에 서서 그의 작업을 잠시 구경하는 동안, 은정이 현관문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사장님, 오셨구나. 왜 춥게 밖에 서 있어요. 안으로 들어오시지!”

“김 사장님이 작업하시는 게 신기해서요. 이렇게 캠핑장처럼 꾸미는 거 처음 보거든요.”

“그러셨구나.”     

운은 웃음기 섞인 은정의 목소리에, 그녀와 마주 보며 따라 웃다가 손에 들고 있던 케이크가 생각나서 불쑥 케이크 상자가 담긴 커다란 종이가방을 건넸다.     

“이거 별 건 아니고, 크리스마스 케이크인데. 함께 먹으려고 사 왔어요.”

“어머. 빈손으로 오셔도 되는데! 고마워요.”     

은정은 그렇게 말하며 받아 든 케이크를 한쪽 손에 들고 남은 빈손으로는 운에게 안으로 들어가자며 손짓했다. 그녀가 안에서 한창 분주하게 바비큐 준비를 하다가 나온 것인지 거실 너머로 보이는 부엌은 결코 한가로워 보이지 않았다.     

“사장님. 초콜릿 드셔보세요. 저번에 배운 대로 만들어봤는데. 크리스마스라서 또 해봤어요. 저번에 소율이가 엄청나게 좋아했거든요.”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은정이 초콜릿을 내민 통에 운은 은정이 조그만 나무 포크에 꽂아서 건넨 초콜릿을 받아 들곤 곧장 입에 넣었다. 쌉싸름한 카카오 파우더와 부드러운 생크림 섞인 밀크 초콜릿이 입안에서 달콤하게 녹았다.     

“맛있어요.”     

그녀가 미소 띤 얼굴로 한 말에 은정이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다행이다. 맞다, 윤오는 좀 늦는다고 했고. 지금 저녁 준비하던 중이라서… 좀 기다리셔야 될 것 같아요.”

“제가 도울 게 있을까요?”

“아뇨, 아뇨. 손님인데. 무슨! 쉬고 있어요.”     

돕겠다는 운의 말에도 은정이 한사코 거절했고, 그러던 중 밖에서 캠핑 준비를 마친 듯한 서준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와 거의 동시에 방에서 놀고 있었던 연준과 소율이 방에서 튀어나와 운을 반겼다. 소율이 두 손에 무언가를 들고선 그녀를 향해 활짝 웃었다.     

“사장 언니다!”     

그 모습에 운이 미소 짓자, 연준과 소율은 앞다투어 거실의 널따란 좌식 나무 테이블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는 운의 양손을 각각 붙잡고 거실로 이끌었다. 그리고 아이가 하고 있던 것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 뿌듯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판을 가리켰다.     

“여기 이렇게 초콜릿을 짜서 넣고, 과자를 넣으면 초코송이 과자가 된대요!”     

소율이 한껏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틀을 하나둘씩 채우고 있는 딸기색 초콜릿, 밀크 초콜릿 위로 손가락 한마디만 한 과자가 비뚜름하게 기울어진 모양새로 꽂혀 있었다. 운은 자신이 어렸을 적에 가지고 놀던 것과 똑같다고 생각하며 소율과 연준의 작품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둘이 완성한 작품을 냉동고 칸에 판판한 곳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서준과 은정의 부탁으로 야외에 서준이 차려놓은 텐트에 두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여기가 우리 아지트!”     

연준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텐트 안을 소개했다.

여기 위에는 랜턴 조명이 달려있고, 아래는 따뜻한 전기요도 있어요! 그렇게 명랑하게 말하며 새로 산 닌텐도 게임기 자랑까지 마치고 나자, 아이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운은 아이들이 각자 자신의 게임기를 자랑하며 해보라고 건네주는 바람에 덩달아 게임에 몰입했다. 어렸을 적에도 유행하던 게임기였는데, 세월이 흘렀다고 업그레이드가 돼서 나왔는지 여전히 재밌긴 했다.

소율과 연준은 앞다투어 자신의 캐릭터를 보라며 손에 쥐어주었고 덕분에 운은 아주 정신이 없었다. 적막하게 홀로 크리스마스를 즐기려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입가에는 끊임없이 웃음이 튀어나왔다.

운은 아이들이 보여주는 동물의 숲 마을을 돌며 이웃들과 한 번씩 말을 나누고 나서야, 개미지옥처럼 따뜻한 텐트 안에서 잠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텐트의 지퍼로 된 문을 열고 나오자, 그 사이 바깥은 꽤나 분주했는지 아까 보았던 천막 아래로 그릇 같은 식기류가 세팅된 테이블을 볼 수 있었다. 운이 감탄하는 것도 잠시 은정이 한 손에 컵을 들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고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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