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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울림 Oct 27. 2024

행복과자점 21화

그녀가 웃는 얼굴로 건넨 핫초코를 받아 들었다. 숨을 들이마시니 추억처럼 밀려 들어오는 핫초코 냄새가 달콤했다. 어렸을 적 마트의 시식 코너에서 한 모금 시식하고 상자째로 사다 두고서 겨우내 우유에 타 먹었던 핫초코의 맛이었다.     

“오늘 눈이 안 온댔는데. 좀 아쉬워요. 화이트 크리스마스면 좋을 텐데.”     

은정이 저물어 가는 하늘의 해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운도 따라서 저 너머의 하늘을 보며 그러게요, 하고 동감했다.     

“애들 놀아주느라 피곤하시죠?”

“아니요, 애들이 워낙 순하잖아요.”     

운은 초등학교 교사인 지인에게서 들었던 아이들 이야기를 되새김질하다 보면, 이 두 아이가 얼마나 얌전하고 순한 양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랑을 부족함 없이 받으며 자란다는 건, 이런 걸까.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게 다 웬 캠핑용품들이에요?”     

소율 가족의 취미가 캠핑이라고 하기엔, 집기들이 너무도 새것 같았다.     

“아아. 예전에 회사 다닐 때 사둔 건데. 몇 번 못 써본 게 아까워서요. 회사 다닐 땐 주말 근무랑 야근하느라 바빠서. 그리고 여기 와선 농사짓느라 바빠서. 이미 매일이 자연이기도 하고-. 그렇게 미루다 보니까 못 쓴 게 아까워서 당근에도 못 내놓겠어요. 그래서 모처럼 크리스마스니까 분위기 좀 내본 거죠. 어때요? 꽤 괜찮죠?”     

캠핑장처럼 꾸며놓은 앞마당은 특별한 날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 같긴 했다. 운이 다시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은정도 따라서 즐비한 캠핑용품들의 개수를 대충 눈으로 세어보는 듯했다.     

“정말 이게 다 얼마야. 회사 다닐 때 소비는 정말 많이 한 거 같아요. 이것저것. 건진 게 별로 없어서 그렇지.”     

은정은 진심으로 아까운 듯 짧게 한숨을 쉬었다가 운에게 대뜸 질문했다.     

“사장님은 어렸을 때,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 선물 있어요?”

“음, 글쎄요-.”     

운은 갑작스레 닥친 질문에 잠시 골똘한 얼굴로 눈을 굴리다가, 이윽고 기억이 떠오른 표정으로 은정을 바라보았다.     

“아! 전 분홍색 곰 인형이요.”

“곰 인형?”

“자고 일어나니까 머리맡에 있었는데. 이게 웬 건가 싶었어요. 그리고 산타할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전 미미 인형 요리사 세트가 갖고 싶었는데. 대뜸 분홍색 곰 인형을 주고 갔다고. 엄마한테 산타할아버진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투정 부렸었는데 엄마가 ‘어…. 산타할아버지가 바빠서 헷갈리셨나 보네.’ 그렇게 말씀하셨었거든요.”

“어머님이 속으로 아차 싶으셨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 저였네요.”


은정의 말에 운은 자작한 웃음을 흘리곤 대꾸했다.     

“은정님은 크리스마스 때 받고 싶었던 선물 있어요?”

“음. 나 어렸을 땐 천사 소녀 네티가 한창 유행했었는데. 그 요술봉이 그렇게 갖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동안 부모님께 산타가 그걸 선물해 주면 좋겠다고 말하고 다녔어요. 왜냐면 난 그때 산타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은정이 고개를 돌려 운을 보고 웃으며 말하곤,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가 공부방에 다닐 때였는데. 어느 날 좀 일찍 가서, 다른 방에서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근데 거기에 빨간색 천으로 된 커다란 주머니가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산타할아버지 선물 주머니처럼 생긴 거였어요.”     

이렇게 커다란 주머니 있잖아요. 산타가 메고 다니는. 그렇게 말하며 은정이 손짓으로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 안에 딱 그 요술봉이 들어있는 거예요. ‘아! 이게 내 선물이구나’ 싶었거든요. 너무 좋아서 그랬나, 그날따라 수학 문제도 잘 풀었어요. 그러다 집에 갈 시간이 되니까, 다른 방 안에서 산타 분장을 한 원장 선생님이 딱 나오시더니 막 애들한테 선물을 나눠주는 거예요. 근데 요술봉을 다른 여자애한테 주는 거 있죠?”

“…어, 그럼. 은정님은 뭘 받으셨어요?”     

운의 물음에 은정이 픽 웃곤 그때를 생각하는 듯 시선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난 그날 문구점에서 팔던 네모난 종이 필통을 받았어요. 지함 필통이라고, 캐릭터가 그려진 종이 상자 필통을 많이 팔았었거든요. 사장님도 아시려나. 아무튼 그래서 학원 끝나고, 학원 차에서 그 선물을 한가득 안은 여자애를 보면서 너무 부러워서. 차에서 내려서 몰래 훌쩍이고 집에 들어갔어요. 아직도 기억나요. 그때가.”     

은정은 일부러 아이같이 가느다란 미성을 내며 어릴 적의 다짐을 재현했다.     

“내가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요술봉도 사야지. 바비 인형도 다 살 거야. 그렇게요.”     

그녀가 혼잣말처럼 끝을 흐리며 말했다. 운은 문득 은정이 받았던 선물의 출처가 궁금해졌다.     

“은정 님이 받은 선물은 어디서 난 거예요?”

“나중에 다 커서 엄마랑 얘기하다가, 우연히 알게 됐는데. 그건 학원 원장님이 학부모들한테 신청받아서, 학부모가 미리 준비 해둔 선물을 전달받아서 나눠줬던 거예요.”     

운은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잔뜩 실망한 얼굴로 기가 죽어선 공부방 한 편에 가만히 연필을 쥔 채 자신이 갖고 싶던 지팡이 요술봉을 받고서 좋아하는 다른 아이를 바라보는 장면이 그려졌다.      

“엄마는 그때 우리 집이 그렇게 넉넉지 못했고, 그 장난감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니까. 대신 책이나 옷을 사주자. 그렇게 생각하곤 선물을 넣지 않으셨대요. 결국 제가 받았던 필통도 원장 선생님이 사비로 주신 거겠죠.”     

그녀가 이제 훌훌 털고 지나간 일이라며 부러 더욱 쾌활하게 말했다.     

“근데 그렇게 어른이 돼서 다 사야지. 다짐했던 게 무색하게도, 막상 다 커버리니까 갖고 싶은 장난감은 하나도 없었어요. 당연한 거지만, 그냥 반짝거리는 플라스틱 덩어리가 되어버린 거죠. 때를 놓쳐버리면 이렇게 되는구나. 그때가 아니면 안 되는 게 있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운은 어쩐지 은정의 시선이 차갑게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그걸 갖고 놀 나이는 지나버렸으니까.”     

그러다 은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생긋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갖고 싶어 하는 장난감은 잘 사주고 싶어요. 유년기의 좋았던 기억들이, 소율이가 어른이 됐을 때 버틸 힘이 되어주었으면 해서요.”     

똑똑. 철문을 가볍게 치는 소리에 운과 은정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대문 앞에서 양손 가득 종이 쇼핑백을 들고서 보란 듯 서 있는 윤오의 모습이 마치 산타클로스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운은 그가 괜히 폼 잡는다고 생각하며, 김윤오를 부르려다가 그가 고개를 가로젓곤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는 것을 보며 갸웃했다.

‘쟨 저기 서서 뭐 하는 거야?’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말이었지만 이미 운의 표정에서 읽혔는지, 윤오가 그녀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애들 크리스마스 선물. 서프라이즈 해줘야지.”     

곧 들고 온 선물들을 아이들이 텐트에서 나오기 전에 얼른 숨겨야겠다며 실내로 들어갔다. 그 바람에 은정과 운도 덩달아 이야기를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오의 등장은 알맞은 타이밍이었는지, 그가 도착하자 환했던 겨울의 해도 점차 내려오고 있었다. 밝았던 낮의 하늘이 셔터를 내리고, 밤하늘이 도래하는 느낌이었다.     

“이게 다 뭐야?”

“크리스마스잖아. 형한테 부탁받은 거야.”     

윤오가 아이들이 텐트에 가서 노느라 방을 비운 틈을 타, 그 방 안에 자리 잡고서 반짝거리는 포장지를 커다란 가위로 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은 옆에서 쭈그려 앉아 그런 윤오를 구경했다.


“뭘 사 온 건데?”

“티니핑 변신 공주 세트랑…. 그리고 연준이 레고……. 그리고, 또…….”     

하면서 윤오가 꽤 긴 선물 목록을 입으로 소리내어 읊었다. 운은 꽤 많은 규모의 선물에 구경하는 재미를 느끼며 요새 장난감들은 참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릴 내며, 윤오는 티니핑 변신 인형을 분홍색 펄이 들어간 하트 패턴 포장지로 감쌌다.     

“나 진짜 이거 찾느라 엄청 고생했잖아. 하츄핑? 캔디핑? 그게 두 개 다 핑크색이고, 내 눈엔 똑같이 생겼는데. 폰으로 검색해 보니까, 이게 아니란 거야. 둘이 다르대. 그래서 지나가는 직원분 붙잡고, 함께 찾아 달라고 부탁하느라 늦었어.”     

수많은 티니핑들 사이에서도 아이가 원하는 티니핑 인형을 찾는 게 거의 명탐정 코난 수준이라고 말이 많았는데, 윤오가 들이미는 사진을 보니 그것도 납득이 간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것 봐. 이건 나도 좀 갖고 싶더라.”     

윤오가 초록색 체크무늬 포장지로 상자를 감싸다 말고 말했다. 커다란 상자 안에는 무선 조종기와 검은색 RC카가 들어있었는데, 운의 눈에도 꽤 갖고 싶은 선물이었다.     

“요즘 장난감 진짜 잘 나온다.”

“그러니까. 난 어렸을 때, 모형 카 정도만 갖고 놀았었는데. 팽이랑.”

“난 요요. 그때 반에서 1등 먹었었는데.”     

그렇게 둘은 나란히 앉아, 방에서 선물 포장 공작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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