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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나무늘보 Oct 18. 2024

너의 자리 (3)

  곱슬머리의 그녀도 곧 그걸 눈치챈 것 같았다. 나에게 좀 더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거는 횟수가 늘어나더니, 언젠가부터는 며느리와 아들 얘기를 집중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어떤 종류의 화제든 결국 그쪽으로 수렴시키는 그녀의 능력은 대단했다.


  “회사 다니시는가 봐요? 가끔 야근도 하고 그러죠? 피곤하겠어요.”

  “네 뭐, 일이 몰릴 땐 야근도 하고 그러네요.”

  “우리 며느리는 초등학교 선생이라 웬만하면 일찍 퇴근해. 그런데 애들이랑 학부모들한테 좀 시달리긴 해요. 쉬운 게 없어, 그치?”


  엘리베이터 광고판에 문화 예술에 대한 뉴스가 뜨는 날도 다르지 않았다.


  “며느리가 그러는데, 요즘은 초등학교에서 애들한테 가수들 춤도 가르친대. 밖에서 강사 데려다가 한다네요.”


  교사, 특히 요즘 교사는 여러모로 힘든 직업임이 분명하지만 옛날 사람인 그녀에게 초등교사란 그저 내세우고 자랑하고픈 직업이었던 것 같다. 그런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교육행정직 공무원 아들은 그야말로 최종 보스 내지는 끝판왕처럼 등장하곤 했다. 그럴 때는 목소리가 한 톤 낮아지면서 분위기가 다소 엄숙해진다. 처음 들을 때는 나조차도 경건한 자세가 될 뻔했으니. 늘 며느리 얘기부터 시작하는 건, 그렇게 능력 있는 여자를 아내로 데리고 사는 아들의 위치를 확인시켜주고 싶어서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거의 나밖에는 없을 텐데도 아주머니는 매번 우리 며느리가 초등학교 선생인데, 우리 아들이 교육행정직 공무원인데, 라는 말을 잊지 않고 했다. 마치, ‘얘한테는 얘기 안 해 줬었지! 얼른 알려줘야겠다!’라고 생각한 사람처럼, 혹은 말 시작 전에 꼭 붙여 써야 하는 접두사처럼.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끔 있는 유형이었다.

내 비록 지금 니들이 하찮게 여기는 일을 하고 있지만, 내 자식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란다.


  나는 그녀가 가엾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끊임없이 교사며 공무원인 자식들을 상기시키는 건 자기를 무시하지 말아 달라는 처절한 몸부림이면서 동시에 그녀만의 오롯한 행복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생 식당에서 일하다가 몇 년 전부터는 김밥집에서 파트타임으로 아르바이트하는 나의 엄마도 비슷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녀를 보면, 안 그런 척, 딸이 다니는 회사와 딸이 사는 아파트 이름을 자랑스레 말하고 다닐 엄마 생각이 났다. 그래서 대개는 아주머니가 전에 했던 말을 반복하더라도, 마치 처음 들은 것처럼 귀 기울여 주는 흉내라도 내려고 한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유난히 그녀의 말이 거슬렸다. 아마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다. 아니다. 사실은, 며칠 전 아파트 공터에서 우연히 들었던 그녀의 통화 목소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평소의 웃음 띤 모습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어둡고 답답한 분위기. 하소연하듯 잔뜩 늘어지는 말투와 한숨, 간간이 섞인 변명과 방어의 말들. 내 경험으로 비추어보건대, 그건 분명히 딸과 대화하는 상황이었다. 놀랍게도 그것 또한 나의 엄마와도 몹시 닮은 모습이었다.     



(4)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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