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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나무늘보 Oct 18. 2024

너의 자리 (6)

  더는 참을 수 없어서 엄마한테 빠른 속도로 쏘아댔다.


  “엄마, 유재희 그동안 노트북 들고 다니면서 그냥 백수건달 짓 한 거야. 공무원은 아무나 되나! 그리고 지금까지 걔가 뭘 끈기 있게 하는 거 봤어? 엄마도 알잖아. 뭘 믿고 또 돈을 줬어요. 걔가 진짜 사업인지 뭔지 성실하게 할 것 같아? 제대로 정신 박힌 인간이라면 어디 가서 알바라도 뛰든가 해서 돈부터 모아야지, 지가 뭔데 일부터 벌이겠대? 엄마 손목 시큰할 때까지 김밥 말아서 번 돈이잖아. 그동안 내가 드린 용돈도 안 쓰고 모아서 같이 준 거 맞지? 다 큰 놈 돈 보태주고 밥해주고, 언제까지 그럴 건데!”

  “나도 속상해. 민경아, 엄마도 힘들어. 술 마시고 즐겁게 사는 천하태평 니 애비는 아들한테 관심도 없고. 재희도 너처럼 알아서 잘했으면 좋았겠지만 안 그런 걸 어쩌나. 너까지 이러면 엄마는 어디다 말할 데도 없어.”


  엄마는 끝내 긴 한숨을 내뱉었다. 재희 앞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물론 나도 안다. 엄마가 그간 쉽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는 걸. 나만 그걸 아는 것도 아닐 텐데, 희한하게도 엄마는 늘 내 앞에서만 약해졌다.


  예전의 나였으면 엄마의 하소연을 조용히 들어주고, 같이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그러면 속마음을 시원하게 토로한 엄마는 개운해지고, 내 공감과 위로로 다시 살아갈 힘을 냈을 것이다. 그러면서 똑똑하고 속 깊은 딸 두어서 다들 너무 부러워한다고 나를 추켜세웠을 것이고, 나는 또 그 말에 뿌듯해졌겠지. 라면도 못 끓이는 서른네 살 유재희보다 훨씬 어렸던 나이에, 바쁜 엄마 대신 동생 밥을 챙겨주면 한없이 칭찬받았던 그때처럼.


  하지만 이건 모두,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아등바등 살아도 확 피어오르지 않는 삶을 버거워하는 부모의 기색과 그들의 지갑 사정까지도 살피던 나, 일찍 철이 들어버렸던 나는 현관문 옆에 붙은 내 방과 거기에 머무르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뒤늦게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습게도, 넉넉하지 않은 집 장녀들은 대개 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 무렵 부동산 시장은 그냥 상승장도 아닌 그야말로 불장의 시기에 들어섰다. 여러 해 전 전세 끼고 사 두었던 소형 아파트 한 채 값이 생각지도 못하게 많이 올랐고, 마침 적금 만기가 다가왔다. 나는 미련 없이 집을 팔고 적금을 보태고 회사에서 대출을 지원받아 이 비싼 아파트 가장 작은 평수를 전세로 구했다. 운이 좀 따른 건 맞다. 그건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말도 내가 해야 하는 것이었다. 나 혼자만 좋은 곳으로 이사 가는 것 같아 잠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너의 무탈한 인생과 타고난 돈복 덕’이라고 축하해주는 가족들의 말에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었다. 그 말이 비아냥대는 것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게 더 슬펐다. 거리두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7)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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