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죽도록 가기 싫은 회사가 이렇게 도피처로도 느껴진다는 건 역설적이다. 내가 지금 피해야 하는 대상이 하필 가족이라는 게 좀 안타깝긴 하지만, 이제는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으면 알게 된다.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사는 게 현명한 것이라는 걸. 그러니까 똑같이 나를 힘들게 하는 상대라면, 정기적으로 돈이라도 주는 회사가 좀 더 낫지 않겠냐고 속으로 되뇐다. 오늘도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갚아야 할 대출금의 일부를 벌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하루의 일과가 끝났다. 피곤한 몸과 맑은 정신으로 집으로 향한다. 엄마의 표현대로 ‘그저 일찌감치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일이 잘 풀려서’ 혹은 ‘재물복이 넘쳐서’ 마련한 것이 아닌, 내 이십 대와 삼십 대의 독기와 열정과 고난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나의 자리로 간다.
내가 아는 유민경은 워낙에 야무지고 알아서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나는 그저 유재희처럼 집안의 대소사와 부모의 근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도록 보호받지 못했을 뿐이다. 언젠가부터 엄마는, 가끔 이렇게도 말하곤 했다.
“넌 그래도 재희보다는 살 만하니까.”
유민경은 살 만해서, 인생에 힘든 일이 없어서 표현을 안 한 게 아니다. 나까지 유재희처럼 징징거리고, 못하겠다고 나가자빠지면 부모님의 마음이 무너질 거라는 생각에 그냥 꾹 참고 내 할 일을 열심히 한 것뿐이다. 나까지 근심을 보탤 수는 없기에, 혹은 나라도 걱정을 끼치지 않게 하려고. 그걸 가족들만 모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가 좀 더 많이 모른다. 아버지와 재희는 모른다기보다는 관심 자체가 없다. 당분간 엄마에게도, 재희에게도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32층 나의 자리는, 따뜻하고 편안했다.
그러나 잊고 있었다. 요즘 내 정신을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생겼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람이 나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어서 피할 수도 없다는 것을. 여전히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던 어느 날 퇴근길, 아파트 단지 공터로 들어설 무렵, 유난히 키 큰 나무들 사이에 마치 몸을 숨긴 듯 보이는 익숙한 실루엣을 보았다. 작고 통통한 곱슬머리의 아주머니는 누군가와 통화 중인 듯했다. 아, 이런 반갑지 않은 데자뷔라니. 내가 지금 볼 수 있는 건 아주머니의 뒷모습뿐인데도, 지난번과 비슷한 표정과 분위기와 말투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뭔가 얘기가 잘 안 되고 있는지 돌아서면서 한숨을 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머니는 얼른 전화를 끊고는 순식간에, 친근하면서도 또한 상대적으로 만만한 입주민을 대하는 그런 얼굴로 돌아갔다.
(9)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