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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나무늘보 Oct 18. 2024

너의 자리 (10)

  평화롭고도 짧기 그지없는, 평일의 어느 소중한 점심시간, 그다지 받고 싶지 않은 전화가 걸려왔다.


  “누나, 다음 주말에 오픈이야. 한 번 와 줄 거지?”

  

  오랜만에 전화해서 인사도 없이 한다는 말이 이따위다. 몰랐던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도 더 개념 없는 녀석이었다.


  “너 참 오랜만이다? 갑자기 전화해서 오픈이라니 뭔 소리야.”

  “엄마가 얘기 안 해? 나 친구랑 가게 열게 됐어.”

  “가게를 오픈한다고?”

  “어, 작은 분식집이야. 인스타 계정도 팠는데 팔로우해 줘. 카톡으로 보내줄게.”


  기어이 재희는 친구라는 녀석과 뭔가를 시작하게 된 모양이었다. 그 가게란 것이 다른 것도 아니고 분식집이라고 하니 어이가 없긴 했지만. 친구라는 놈도 어떤 놈인지 알만했다. 도대체 라면도 못 끓이는 녀석이 웬 분식집이냐고 잔소리하려던 순간, 혹시 이놈이 엄마를 공짜 주방 인력으로 부려 먹으려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강하게 들었다.


  “너, 엄마 돈도 안 주고 주방에서 일 시키려는 건 아니지?”

  “에이, 아냐. 뭔 그런 소리를…. 누나, 나 이번엔 진짜 제대로 해 볼 거야. 그리고 우리 가게, 엄마 알바하는 김밥집하고는 컨셉이 달라. 인테리어도 인스타 감성으로 했어. 사진 찍는 거 좋아하는 이십 대 여자애들이 타겟이야. 여자들은 원래 분식도 좋아하잖아?”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한다. 기가 막힌 시장 조사에도 감동할 지경이다. 혹시라도, 엄마를 그렇게 날로 부려 먹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든지,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되지만) 비록 립서비스일지언정 나중에 가게가 좀 안정되면 엄마를 메인 셰프로 모시겠다든지 정도의 말을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 재희 말대로 나이 든 김밥집 아르바이트생 엄마는, 그저 아들의 힙한 가게와는 컨셉이 달라서 함께 하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재희는 엄마라는 사람이 필요했다면 무보수나 최저 임금도 되지 않는 시급으로 주방 노동을 요구했을 가능성이 크다. 엄마도 늘 일이 안 풀려서 딱한(그렇다. 엄마는 정말 녀석의 일이 지독히도 안 풀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아들의 부탁을 차마 뿌리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나오는 부작용 ­ 엄마의 어깨와 손목 통증 호소, 엄마의 한숨과 스트레스 등 ­ 은 내 차지가 되었겠지. 그간 벌어졌던 일들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 패턴이다. 이번에는 엄마의 돈은 들어갔지만, 엄마의 노동력까지는 들어가지 않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나저나 재희가 나의 까칠한 분위기와 잔소리를 넉살 좋게 웃어넘기는 게 수상하다. 그동안 잘난 누나한테 눌려 살았다며 되도 않는 서러움을 주장하는 녀석이, 인강 수강권과 비싼 노트북을 받아놓고 임무 완수도 하지 못한 채 잠수 탔던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전화한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말이다. 나는 동생이 나에게 뭔가 요구하고 싶어 한다는 걸 곧 알아챘다. 아마 돈이거나, 가게에 필요한 값비싼 물품이거나 뭐 그런 것일 거다. 가끔은 눈치 없이 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하지만 이번엔 짐짓 모르는 척해 보기로 했다. 재희는 내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으니 민망했던 모양이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누나 ○○ 아파트 살지? 거기에 아이돌이랑 배우 누구 산다며. 같은 입주민인데 그 사람들하고 안 친해? 누나가 데려오면 가게 완전 홍보될 텐데’ 등의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지껄이며 꼭 와 달라는 말을 남기고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곧 분식집 인스타그램 계정이 링크된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어떤 꼴인지 클릭이나 해 봤다. 잡다한 이모티콘과 유치한 워딩의 해시태그로 범벅이 된 소셜미디어 속 분식집 이름은 <떡볶이집 오빠들>이었다. 간판 제작 사장님은 이 문구를 들고 와서 까불어대는 두 녀석을 번갈아 보며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간판은 죄가 없지만, 아무튼, 할 말이 없었다. 엄마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쨌든 아들의 거취가 결정되었으니 일단 한숨 놓기는 할 것이다.


  물론 보이는 것만큼 속이 편하진 않을 거라는 걸 안다. 내 몸과 마음의 안정을 위해 거리를 두고는 있지만, 무심한 남편과 반백수 아들 사이에서 한층 더 빠른 속도로 늙어갈 엄마가 걱정스러워졌다. 동생의 앞날에 재를 뿌릴 마음은 없다. 그렇지만 엄마의 투자금이, 엄마의 노후 자금이 되어야 했을 그 돈이 엄마 통장으로 다시 들어오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11)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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