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나 봐요! 늘 이 시간에 오시나? 난 아까 끝났는데 아직도 집에 못 가고 이러고 있네.”
“네, 그런데 통화하시던 중이었나 봐요. 아드님?”
순간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더니 작은 목소리의 대답이 흘러나온다.
“아니, 딸이에요. 나 큰애가 딸이야.”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엄마의 처량한 분위기와 늘어지는 넋두리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설사 그것이 틀에 박힌 편견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내가 겪은 세상에서는 예전부터 그런 일이 생겨왔고 지금도 생기고 있으니. 나는 순간 내 처지와 다를 것 없는 그 딸이 몹시 궁금해지며, 약간은 심술궂은 생각도 들어서 은근한 미소를 띤 채 물어보았다.
“어머 그러시구나. 따님은 무슨 일 하세요? 따님도 공무원?”
이제 그녀는 체념하는 표정으로 내게 털어놓는다.
“아니, 얘는 자기 가게 작은 거 하나 해요. 아직 결혼도 안 했고, 그러니까 우리 아들네보다는 시간이 자유로와. 동생네가 맞벌이하면서 애들 보는 거 어려우니까 시간 남는 니가 좀 도와주면 어떠냐고 했는데…. 손주 봐주는 사돈이 요즘 몸이 안 좋아서 힘들어하시거든. 이럴 때 형제지간에 도와주면 좋잖아. 아가씨, 아가씨도 동생 있어요?”
“네, 남동생 있어요.”
“그래? 누나니까 동생 좀 보듬어 주고 그래야겠네. 나중에 부모 없을 땐 맏이가 부모 대신이잖어. 특히 아들들은 뭘 잘 몰라. 누나가 나이도 많고 또 여자니까 이것저것 잘 챙겨줄 수 있지.”
그때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아주머니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돌아서고, 생각지도 못한 일격을 당한 나는 순간 멍해졌다.
멀어져가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그녀의 딸을 생각한다. 그 딸은 알고 있을까, 자기 엄마가 일터에서 남동생과는 달리 본인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걸. 그 딸은 알고 있을까, 자기 엄마가 자기한테는 이런저런 하소연 같은 감정 표현을 어렵지 않게 하고 또 그걸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걸. 그 딸은 알고 있을까, 자기 엄마가 자기에게 다 커서 가정까지 이룬 남동생을 부모의 마음으로 돌봐주길 바란다는 걸….
나는 묘하게 다르면서도 비슷한 상황의 나와 그 여자를 비교해 본다. 백수 동생을 둔 잘난 누나와 잘난 동생을 둔 평범한 누나. 우리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바깥에서 부모를 우쭐하게 해 주는 트로피로 쓰였냐 쓰이지 않았냐 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밖에서의 역할과는 상관없이, 그 여자도 나도 집안에서는 그저 비슷한 말을 듣고 비슷한 책임을 은근히 부여받으며 자라왔을 것이었다. 부모 없을 땐 맏이가 부모라던 아주머니의 말은 나도 수없이 들어왔다. 수없이 들은 정도가 아니라, 사실 너무도 비슷한 소리를 밖에서 또 듣게 되어 나는 조금 서글펐다.
어느새 낮게 내려앉은 어둠,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서늘한 저녁 바람이 분다. 우수수 소리를 내며 잎사귀들이 한꺼번에 흔들린다. 며칠 전 아침에 살짝 느꼈던 오한이 다시 오는 것 같다. 재킷을 여미고 급하게 집으로 향한다. 정문에 서 있던 보안요원이 아파트 키를 손에 쥔 채 지극히도 쓸쓸한 얼굴로 걸어오는 나를 보고, 내가 들어갈 때까지 문을 열고 또 잡아주었다. 그날 밤 나는, 조금 앓았다. 유자차도 소용없었다.
(10)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