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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주 Sep 22. 2023

열리지 않는 커튼

외노자 시절 장난 같은 일을 많이도 겪었는데요. 회사는 합병된다 난리법석 계속되는 인원감축 그야말로 온갖 것에 정나미가 떨어지는 나날이었습니다.


하루는 출근길에 주저앉을 것만 같아 내려야 할 역이 멀었는데도 하차했습니다. 열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며 이상한 쾌감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의자에 맥없이 무너지듯 걸터앉고 얼굴을 무릎 가까이 가져갔지요.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고개를 들자 새로이 선로에 들어온 열차가 막 떠나고 있었습니다. 아아 이연주는 뭐든 다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잔뜩 구겨진 채로 다음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날 저는 다시 한번 그 누구도 저의 입장에는 관심 없음을 실감했지요. 어쩌면 화가 났던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육체와 정신의 완벽한 분리를 느꼈습니다. 퇴근 후 돌아온 집에서 저는 최대한 스스로 대접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평소에 하지 않는 요리를 하겠다고 이것저것 자르다가 손가락을 자르고 말았습니다.


뼈가 보이길래 겁이 덜컥 났습니다. 택시 안에서 검게 적셔지는 타올을 보며 구역질을 애써 참았는데요. 응급 처치를 받는데 왜 눈물은 참아지지 않았을까요. 간호사가 옆에서 얼굴을 계속 닦아주면서 무어라 말을 했는데 단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제게 다시 내원을 해야 한다며 그때까지 상처가 벌어지면 안 되니 회사에 병가를 제출하라며 증빙서류를 주었습니다.


다음 날 저는 당연하게도 회사를 가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리자인 레터를 작성하고 발송했습니다.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쉬운 일에 그동안 저는 왜 이렇게 많은 감정을 소모해야만 했었는지 그저 우스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다친 손가락이 이상하게 아파오는 것입니다. 진통제를 먹어도 불타는 느낌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전날과 다른 병원에 갔는데 왠지 모르게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제 손가락을 본 간호사가 기겁하더니 의사를 불러왔습니다. 의사는 화를 내기 시작했는데요. 저더러 당장 그 병원으로 가서 클레임하고 재봉합을 해야 한다고 하길래 당황스러웠고 그러자 말이 잘 안 나왔습니다. 가까스로 이곳에서 치료를 받고 싶다고 했고 정신을 차리니까 모든 것이 끝나 있었지요. 간호사는 예쁜 손가락을 어쩌다 그랬냐고 이제 다 괜찮으며 본인이 책임지고 할 테니 매일 드레싱을 받으러 오라고 했습니다. 정말이지 선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인생사 새옹지마 손가락 덕택에 저는 퇴사일을 획기적으로 앞당길 수 있었습니다. 오프보딩은 지긋지긋했습니다. 결정은 자꾸만 미뤄지고 안 그래도 피곤한데 피곤한 일이 자꾸만 생겼습니다. 저는 말이죠. 오래 끌고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말입니다. 묻고 싶었던 감정도 그래서 잘 모르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일도 마무리가 되기는 하더라요. 한국에 돌아와서 한동안 즐겁고 괴로웠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웃고 두고 온 사람을 생각하며 쓰라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행동에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선택은 어렵지 않고 무엇이 어찌 되든 계속해서 마주하고 싶을 뿐이어요. 드러내는 것은 제가 택한 방법이고 각기 다르고 고유하듯 모두 완전히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끔씩 스스로 너무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는 합니다. 만나기 위해 헤어지는 건지 헤어지기 위해 만나는 건지 뻗어가면서도 또한 비어 가고 있는 듯합니다. 떠날 때는 짐이 너무도 많아 어쩔 줄 몰랐는데 돌아올 때는 헐빈하기 그저 없으니 생은 어쩐지 거대한 농담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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