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와 메일을 확인해보니, 서류에는 합격했고 스카이프로 면접을 진행한다고 했다. 급하게 스카이프 아이디를 만들고 내 아이디를 보냈다.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문의해보니, 지원한 회사의 인사담당자와 1:1 혹은 2:1로 면접이 진행될 거라는 안내를 받았다. 당연히 면접은 일본어로 봐야 한다. 한국어로 해도 몇 번이나 떨어진 면접이었는데, 일본어로 붙을 수 있을까?
면접일까지 벼락치기라도 해보자. 뭔가 단시간에 말하기/듣기 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쉐도잉'을 해보기로 했다. '쉐도잉'이란 오디오를 틀어놓고 한 템포 느리게 들은대로 똑같이 말하는 걸 연습하는 언어학습방법인데, 대학교 2학년 때 통번역 강의에서는 주로 뉴스를 다뤘기 때문에 많이 어려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당시 즐겨보던 일본드라마로 해보기로 했다.
[프리타, 집을 사다]라는 드라마였는데, 나처럼 사회초년생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선택했다. 한글자막을 켜놓고 드라마를 보면서, 배우들이 대사를 할 때마다 그 일본어대사를 억양까지 그대로 흉내내면서 따라 말했다. 확실히 대화체를 쓰는 드라마라서 그런지 더 따라하기가 쉬웠다. 내 귀에 들리는 일본어와 한글자막을 비교하면서 여러 가지 표현에 대한 공부도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스카이프 면접 당일!
스카이프 화면에 나오는 건 상반신까지이다보니, 위로는 정장, 밑으로는 잠옷바지를 입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대기하고 있었다. 나중에 해외인턴 환영회 때 농담으로 말씀드렸더니 그런 줄 알았으면 안 뽑았을 거라고 받아치셨던 사장님(웃음).
드디어 화면이 켜지고 내 앞에 나타난 면접관은..
1명도 아니고 2명도 아닌 3명이었다.
온라인 면접이라서 화상채팅 느낌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사무실에 데스크까지 갖춘 완전한 정식 면접 장면이 눈앞에 나타나니 조금 당황했다. 각자 소개를 먼저 해주셨는데, 왼쪽에 인사부 부장님, 가운데에 사장님, 오른쪽에 기획부 과장님이 계셨다. 그리고 면접관은 아니지만 글로벌터치코리아(해외채용중개회사)의 사장님까지 함께 계셨다. 어색했지만 승무원 학원의 반복 학습으로 나오는 환한 미소와 함께 면접을 시작했다. 다행히도 승무원 실무면접에서 봤던 면접관들과 달리 세 분 다 표정이 정말 온화하셨고, 따뜻한 말투로 말을 걸어주셨다. 예상질문이었던 지원동기와 내 성격, 이력서에 쓴 내 직무경험에 대해 먼저 물어봤기 때문에 편하게 면접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래서인지 쉐도잉이 단시간에 이렇게 큰 효과를 줄 수 있는건지 몰라도, 그분들의 말이 너무나 잘 들리고 나도 일본어로 대답이 술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살면서 일본어로 그렇게 길게 대화해본 건 처음이어서 내가 이렇게나 일본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스스로도 놀랐던 것 같다. 그래서 나처럼 읽고 쓰기는 되는데 말하고 듣기가 서투른 사람이라면 꼭 쉐도잉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렇게 나의 가족이나 취미 등에 대한 이야기와 회사에 대해 궁금한 걸 물어보는 시간을 거쳐 스카이프 면접을 시작한 지 40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가운데 앉아 계셨던 사장님께서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하라고 해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제 면접 어떠셨나요? (私の面接はいかがでしたか。)
면접 분위기가 너무 편안해서 좀 당돌해보일 수도 있는 질문을 농담처럼 던졌는데, 그 질문에 가운데 앉아 계셨던 사장님께서 웃어주시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밧치리데시타(ばっちりでした。)
나는 당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지만, 사장님의 표정과 말투, 주변 분위기를 통해 좋았다는 말로 알아 들었다.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니 위와 같은 뜻이었다. 그래서 합격 통지를 받기 전부터 면접에 합격했겠구나 확신했던 것 같다.
그런데 면접이 끝이 아니었다.
면접에 합격하면 그대로 최종합격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 관문인 적성검사(SPI)를 봐야 한다고 했다. 메일로 보내준 적성검사 링크에 접속해서 정해진 시간 안에 문제들을 풀어야 한다. 링크 유효기한은 7일이 남아 있었고 무작정 접속하면 시험이 시작되어 버리기 때문에 남은 시간을 어떻게든 활용해야 했다.
나는 일본취업을 준비하다가 이 채용에 응한 것이 아니고, 우연히 채용공고를 발견해서 지원한 것이었기 때문에 적성검사의 '적'자도 모르는 상태였다. 국내에서도 적성검사를 봐야하는 채용공고에 지원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채용공고를 낸 글로벌터치코리아에서 운영하는 Daum카페에 유용한 정보가 있나 찾아보았다. 다행히도 일본취업정보 게시판에 기출문제들이 나와 있었다. 언어와 비언어(수학)문제가 있었는데, 모두 객관식이었다.
수학문제는 유형이 다양했지만 중고등학교 때 배웠던 개념들이었고 난이도가 높지는 않았다. 다만 수학문제가 일본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유형의 문제를 하나씩 풀어 보면서 수학 용어들을 일본어로 익히는 데에 집중했다.
그리고 언어문제는 동의어, 반의어, 관계 알기 등 한자어를 포함한 일본어 어휘력을 보는 문제였다. 최대한 많은 기출문제를 푸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야후재팬에 일본어로 "SPI 문제"를 검색해보았다. 생각보다 무료로 적성검사 문제 샘플을 제공하는 사이트가 많았다. 그래서 가능한한 많은 문제를 끌어 모아 그 문제들에 나와 있는 모든 단어들을 외우려고 노력했다. 모르는 단어를 검색하고, 말하면서 쓰고 잘 외워지지 않는 단어만 따로 노트에 정리하고 어찌 보면 JLPT를 준비할 때와 비슷한 방법으로 공부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모든 집중력을 총동원해서 공부를 하고 있던 4일째, 왜 아직도 적성검사를 보지 않냐고 글로벌터치코리아에서 연락이 왔다.(웃음) 아마도 나 외에는 모든 지원자들이 적성검사를 마친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메일을 또 확인을 못한건지 채용을 포기한건지 걱정이 되었나보다. 나는 아직 기한이 남아서 공부를 더 하고 마지막날에 적성검사를 보려고 한다고 말씀드렸고, 남은 시간을 꽉꽉 채워서 준비한 다음 적성검사를 보았다.
정말 다행히도 언어 문제는 내가 공부한 단어들에서 대부분 문제가 나왔고, 수학 문제는 시간이 좀 부족해서 다 풀진 못했지만 푼 문제는 다 맞췄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며칠 뒤 최종 합격 메일을 받았다. 합격이라니.. 취준하면서 얼마나 듣고 싶었던 단어인가.
참고로 최종 합격자는 2명이었고, 우리 둘다 적성검사 점수가 매우 높은 편이었다고 한다. 나처럼 일본어능력시험 N1급인 사람이라면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면접과 적성검사 정도는 충분히 벼락치기로 준비 가능하다는 게 증명된 셈이다.
일본에 살면서 알게 된 사실로는, 일본은 고령화가 우리나라보다 빨리 진행되어 젊은이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취준생들이 한 번에 2~3개의 회사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는다. 회사는 신입사원을 잃지 않기 위해 정기적으로 전화를 하면서 '관리'까지 한다고 한다. 외국인으로서 일본회사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보통 필수조건으로 JLPT1급~2급을 갖고 있어야 하지만, IT쪽은 사람이 부족해서 통역사를 붙여서라도 데리고 오려고 한다는 말도 있다.
한국에서는 군인이었다는, 일본에서 만난 한국인 지인은 3년 내에 아래의 케이스를 달성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일본어과외를 받으며 JLPT3급을 획득 > 삿포로에 워킹홀리데이를 와서, 일본인과 외국인이 함께 사는 쉐어하우스에 살면서 청소부로 일함 > 한국으로 돌아가서 무료직업교육으로 코딩을 배운 다음 도쿄의 일본IT회사에 취직 > 1년 뒤 본인이 원하던 연봉보다 더 높게 제안을 받고 주택도 지원 받음 > 일본 여자와 결혼 후 정착'
외국어를 좋아하고 꼭 한국에 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면 같은 직군이라도 더 높은 취업률과 좋은 조건으로 경험도 쌓고 정착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