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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겨진 삶

by oj Aug 26. 2024


아파트에 처음 입주했을 때 이웃으로 만난 앞집 아주머니는 연세에 맞지 않게 활기차고 적극적인 분이셨다. 부동산 일을 하시면서 일도 다니시고 차  한 잔 마시러 갔을 때도 집이 깔끔하며 가구와 인테리어도 세련되어  우리집과 비교될 정도였다.


서울에서 살다가 분양 받아 오신 분인데 경기도 변두리의 낙후된 주변 환경을 보고 적잖이 실망이 컸다고 하셨다.

일산에 모델하우스가 지어져 신도시에 위치한 아파트인 줄 알고 이사오니 구도시였지만 살아보니 교통이 편리하고 정이 간다며 만족해하셨다.


2002년 여름 월드컵의 열기가 뜨거울 때쯤 입주를 같이 해서 자주 마주치며 인사할 때마다 얘기도 많이 나누는 친근한 이웃이었다. 조용하신 성품의 왜소하신 남편분과 아드님 둘과 함께 다복해 사시는 가정이었다. 어린 우리 두 아이들이 인사를 건넬 때마다 무척 귀여워해주셨다.


입주하고 1년도 안 돼서 작은 아이가 입학한 뒤 등하교 때문에 초등학교 근처로 이사를 갈 때 무척 아쉬워하셨다. 엄마집 근처로 전세를 얻어 몇 년 동안만 살기로 했다. 1학년은 급식이 제공 안된데다가 신호등을 몇 개나 건너서 집에 와야 하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새 아파트를 전세주고 이사를 감행했다. 그 때 앞집 아주머니와 인사하며 다시 올 거니까 그 때 만나자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친정 근처 아파트에서 4년을 살았다. 아이들 학교도 가깝고 엄마집도 가까워서 일을 하는 나로서는 아이들을 맡기면서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니 안심도 되고 일단 마음이 편했다.


4년 만에 아파트로 다시 들어가면서 새로운 기분으로 이사를 준비했다. 중학교가 가까워진 큰 아들은 학교 다니기 편해졌고 작은  아들 등교는 차로 도우면서 자주 들락날락 했는데 이상한 건 앞집이 유난히 조용하다는 것이다.


이사 온 뒤 몇 달이 지났는데도 인기척이 없고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이사 갔나 싶어 이웃들에게 물으니 정확히 근황을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리고 앞집 아주머니를 오래간만에 다시 만났을 때 너무 수척해진 모습에 깜짝 놀랐다. 몰라보게 살이 빠지시고 피부는 푸석해지시고 생기가 없어진 모습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싶었다.


그 때 아저씨께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근황을 듣게 됐다. 너무 젊으신 나이에 준비되지 못한 갑작스런 이별은 아주머니를 너무 변하게 만들었다. 내가 이사 오기 1년 전 일이라고 했지만 여전히 슬픔과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셨다. 힘내시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해드리고 가끔 뵐 때도 어두운 표정에  안쓰럽고 마음이 무거웠다.


아직 부동산 일을 다니시고 계셨고 큰 아들은 결혼 했다는 말에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점점 초췌하게 변하는 아주머니를 뵐 때마다 걱정이 되었다. 손에는 늘 막걸리에 소주가 담긴 술 봉지가 들려있었고 눈은 전보다 더 쾡해 보였다. 점점 더 앙상해가는 아주머니는 낯빛까지 변해 병색까지 느껴졌다. 무표정해지셨고 말은 어눌해지셨고 눈을 마주 쳐도 도무지 생기가 없었다.


식사는 잘 하시는지 아들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했지만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한참 동안 두문불출하신지 뵐 수가 없을 때쯤 앞집 아주머니 근황을 묻는 이웃들이 있었다.

항상 술을 사들고 다녀서 알코올 중독 같다며 걱정 된다고 묻는 걸 보니 꽤 많은 이웃들이 본 것 같다.


오래간만에 아주머니를 다시 뵌 것은 아파트 현관 입구 계단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계신 모습이셨다. 왜 이렇게 오래간만이냐고 일으켜드리고 부축해서 집으로 모셔다 드렸다. 손까지 떨고 계셨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셨다. 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현관은 치우지 않은 술병으로 가득했다. 너무 안타까웠다. 술은 이제 드시지 말고 식사 잘 하시라고 안으로 모셔다드리고 나왔는데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며칠 후 119가 오더니 앞집 아주머니가 실려 가셨다.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저씨가 돌아가시고 혼자 남으신 아주머니가 그 슬픔을 술로만 달래셔서 알코올 중독이 되면서 심정지로 이어진 것이다. 부부가 함께 살다가 사별을 하는 것이 가장 큰 스트레스라는데 아주머니도 그 중의 한 분이셨다. 강하고 씩씩하셔서 잘 이겨내실 줄 알았는데 생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 씁쓸해보였다.


부부로 살다가 헤어짐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그 슬픔을 잘 견디면서 먼저 간 사람의 몫까지 씩씩하게 살아간다면 좋겠지만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아버지가 먼저 떠나셨을 때 홀로 남겨진 엄마도 1년을 넘게 우울해하셨고 지금도 언제 떠나도 미련이 없다고 하신다. 오래 함께 해로한다면 좋겠지만 그건 우리 힘으로 될 수 없는 일이다. 바라 건데 부부가 함께 한 시간을 소중히 여기면서 그 시간들을 잊지 않고 추억하며 견뎌내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슬프지만 인생이다.


19층에 사시는 아저씨 한 분은 부인과 언제 무슨 이유로 사별하셨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매와 셋이 지내면서도 늘 밝은 얼굴이셨다. 아이들과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면 항상 반갑게 먼저 인사하시고 아이들도 얼마나 예의가 바르고 밝은지 모른다. 아이들과 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계셨고 가족들 표정이 항상 밝았다.


쑥쑥 크는 남매를 볼 때마다 놀라면서 인사를 건넬 때면 앞집 아주머니 생각이 났다. 이렇게 잘 이겨내시면서 밝고 씩씩하게 사시는 분도 계시는데 조금만 더 힘을 내시고 강하고 긍정적으로 사셨다면 그렇게 씁쓸한 모습으로 떠나시진 않았을 텐데.


지금은 아드님 혼자 사는데 가끔씩 볼 때마다 점점 얼굴이 어두웠다. 집은 내놓은 것 같았지만 아직 매매가 되진 않은 것 같았다. 항상 적막만 흐르는 앞집을 마주할 때마다 문득 문득 그 때 모습이 떠올라 지금도 마음이 편치 않다. 이제 그리운 아저씨와 만나서 오붓하게 손잡고 계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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