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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j Oct 25. 2024

지키고 싶던 비밀

ㅡ'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낭자' ㅡ

영화 스틸컷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원작 <책 읽어주는 남자> 는 <더 리더> 란 영화로 만들어진 꽤 유명한 작품이다.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영화를 보고 충격과 감명을 받은 선명한 기억이 난다. 소설로 출간되었을 때 도덕적 잣대로 무수히 비난을 받았다고도 한다.


여주 한나는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인이었다. 그 비밀을 간직한 채 15살 소년과 사랑에 빠진다. 전차 검표원이던 한나는 어린 소년 마이클을 도와준 일을 계기로 그 소년과 사랑에 빠진다. 36살 여인인데 어린 소년과 육체적 탐닉에 빠지는 모습이 처음엔 보기 불편했다. 마치 어린 제자와 사랑이란 이름으로 교제를 한 여선생님이 비판받는 게 당연하단 이성적 뇌가 작용했다.


어느 날 소년이 읽어준 책에 매료된 한나는 마이클이 읽어주는 책의 내용에 몰입하며 울고 웃는다. 그때 한나의 표정은 너무 행복해 보였다. 마치 새로운 신세계를 발견하고 희열에 빠진 것처럼 말이다.


처음엔 둘의 관계가 이해되지 않았다. 남편이 오랫동안 실종된 유부녀가 혼자  딸을 낳아 키우는 부도덕한 행실로 인해 가슴에 주홍 글씨 A(Adultery) 를 새기고 다녀야만 했던 소설 속 헤스터와는 확실히 달라보였다. 마을에서 떨어져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고결하고 품위를 잃지 않는 그녀와는 달리 한나는 육체를 탐닉하는 여성처럼 보였다.


이렇게 오래 지속된 관계의 끝은 왔다. 한나가 검표원에서 사무직으로 승진된 후 말없이 떠날 때 마지막으로 그의 몸을 씻겨준다. 자신과 부적절했던 과거를 잊고 다시 새출발하란 의미였다는 생각이 든다. 홀로 남겨진 뒤 8년이란 시간이 흘러 마이클은 법대생이 되고, 아우슈비츠 관련 재판에 참관했다가 피고인석에 앉은 한나를 만난다.


그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여자 감시관이었다는 사실로 재판을 받았지만 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만 밝히면 무죄가 되는 데도 수치스러운 자신의 비밀을 밝히기 싫어 모든 죄를 인정하고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또한 법정에서 자신은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이라며 외친다.


마이클은 그녀를 돕고 싶었지만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자괴감에 빠지고 나중에 그녀에게 읽어준 책을 보며 다시 한나를 위해 책을 읽고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보내는 것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을 대신 한다. 한나는 감격하며 그 테이프를 듣고 간직하며 독학으로 글을 배워 편지를 쓰지만 답장을 받지 못한다. 마음속에서 잊은 것도 아니면서 답장을 하지 않은 마이클의 속내가 궁금했다.


한나의 가석방 소식이 마이클에게 전달되면서 한나와 다시 마주했을 때 "꼬마가 어른이 됐네" 라고 말하는 한나와 이제 인생의 뒤안길에 선 그녀를 바라보는 마이클, 두 사람 눈빛이 뭉클했다. 숙소를 마련하고 일주일 후에 데리러오겠다는 마이클을 만난 뒤 냉랭해진 그의 태도와 자신의 죄를 자각한 한나는 출소 하루 전날 밤 자살하며 생을 마감한다. 마지막 편지와 사죄의 마음을 담은 유품을 피해자에게 남기고 말이다.


왜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충격적이기도 했고, 많은 의문이 들었다.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비밀이었고, 원하던 문맹에서 탈피해 이제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됐는데 무엇이 두려웠을까. 죄의 처벌도 모두 받아서 이제 자유의 몸이 되어, 그렇게 읽고 싶던 책도 마음대로 읽게 되었는데 왜였을까.


<쇼생크 탈출> 에서 50년이라 감옥생활을 하고 나온 브룩스가 너무나 달라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감당할지 몰라 스스로 목을 맨 이유와 같은 것은 아니었을 텐데...


유대인 학살을 담당한 수용소의 감시관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무거운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사랑한 마이클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모르지만 후자에 가까웠을 거란 생각이다.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될 것 같다. 부적절한 행동을 했던 여인임에도 직접 읽을 수 없어 소년이 읽어준 책을 통해 매료되며 마음을 정화시킨 것과 책을 읽어주던 순수한 소년을 사랑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나를 연기한 케이트 윈슬렛의 원숙한 연기가 빛을 바랐다. 그녀는 절대 보정이나 아름답게 보이기에 애쓰지 않는 배우로 당당하면서도 내면이 아름다운 배우로 유명하다. <타이타닉> 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을 선사한 여배우로서 살이 찌고 젊음을 잃는 것이 두렵기도 할 텐데 그녀는 용기있고, 작품을 선택하는 안목도 탁월하다. 이 작품은 그녀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기기도 했다.


<더 리더> 를 보면서 마음이 참 복잡했다. 소년의 육체적 탐닉을 기꺼이 받아준 여인의 행동을 비판해야 옳지만, 세상은 부도덕한 일로 비일비재하고, 잘못을 저지르고도 큰소리치며 떳떳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로 득실댄다. 한나의 마지막 선택은 그런 비판에서 해방시켰다. 자신만의 자유를 찾은 것 같은 마지막 선택이 용기 있었지만 그럼에도 삶을 선택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연민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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