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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j Nov 01. 2024

가을의 길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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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사색하기 좋은 계절이다. 화려한 옷을 갈아입으며 붉게 물든 단풍잎만 봐도 바람에 뒹구는 낙엽만 봐도 괜히 마음이 센티해진다. 곧 쓸쓸히 질 것을 알기에 이 가을을 놓칠세라 가을 정취에 스며들고 있다.


가을을 독서의 계절. 하늘은 높고 말은 살지운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이기도 하다.

깊어가는 가을, 사랑하기 딱 좋은 계절 사색에 잠기며 내가 선택한 시집은 '김초혜' 시인님의 시집이다. 예전에 183편이나 되는 연작시 <사랑굿> 을 강렬하게 읽었다. 사랑을 왜 굿으로 표현했는지 궁금했는데 사랑, 이별, 아픔, 그리움, 애절함 등 사랑의 모든 행동과 몸부림을 말한다는 걸 알았다.


김초혜 시인은 대하소설 <태백산맥> 조정래 작가 부인으로 시를 쓴지 60년이 되었다고 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연륜에서 나온 시의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지만 이번에 읽은 시집 <그리운 집> 은 감성을 자극하는 서정적인 시여서 느껴지는 대로 흠뻑 시에 취한 하루였다.


가을의 시


묵은 그리움이

나를 흔든다

망망하게

허둥대던 세월이

다가선다

적막에 길들으니

안 보이던

내가 보이고

마음까지도 가릴 수 있는

무상이 나부낀다


ㅡ시에서의 무상이 모든 것의 덧없음의 무상인지 모든 집착을 떠난 경지의 무상인지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제목이 <가을의 시> 라서 무작정 좋았다. 묵은 그리움, 허둥대던 세월, 적막에 길들임 등이 좁은 소견으로 고독의 표현 같기도 하고, 인생무상을 떠오르게 하기도 했다.


바람이여


그만 고삐를 놓자

나의 비밀의 부분은

어두운 아침과

불행한 침묵뿐이다

심장의 수선거림은

사람살이를 노곤하게 하고

떨고 서 있어도

추운 줄 모른다

꿈에 네가 오는 날은

오관을 풀어놓는다

인생이 한순간인 것을

뒤늦게 안다


ㅡ 인생이 한순간인 것을 뒤늦게 안다는 마지막 구절에선 지난 주에 갑자기 소천한 고 김수미 배우님이 떠올랐다. 개성 있는 연기에 억척스런 성격에 당차고 건강해 보이는 사람도 한순간 인생을 마감한다. 75세라는 아직은 창창한 연세임에도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났지만 화려한 명성과 뜨겁게 살아온 날들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언제까지 사느냐 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만월


달밤이면

살아온 날들이

다 그립다


만리가

그대와 나 사이에 있어도

한마음으로

달은 뜬다


오늘밤은

잊으며

잊혀지며

사는 일이

달빛에

한생각으로 섞인다


ㅡ만월한 달을 보면 살아온 날들이 그립고 뜨는 달을 보면서 잊고 잊혀지며, 달빛에 한생각으로 섞인다는 서정적 표현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내가 살아온 날들도 떠오르고, 이제 새롭게 가정을 이룬 두 아들들도 내가 걸어온 날들처럼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애잔하게 오버랩 되면서 나또한 한생각으로 섞였다.


김초혜 작가님은 우리 삶을 반추하게 만드셨다. 깊숙히 숨어있던 감정까지 세밀하게 끄집어내고 내면을 들여다보고 깊이있게 해주셨다.


60년을 시인으로 살아온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인생의 뒤안길에 계시지만 시인님이 추구한 시의 세계는 우리 삶을 투영하고, 우리 마음 한 켠에 자리잡아 살아 숨쉬게 한다. 얼마나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인가.


가을 정취를 바라보며 시집 한 권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시를 음미하기 권한다. 가을의 길목에서 읽는 시는 어떤 시든 마음을 움직이고 묵힌 감정의 찌꺼기들이 정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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