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자란 서울의 한복판이었다. 복잡하고 오밀조밀 다닥다닥 붙은 풍경이 즐비한 모습이었다. 방으로 분리된 식당이 거의 없던 밀집도가 높은 동네였다. 조카의 백일잔치에 큰형은 용케 마땅한 식당을 찾았고 건물 앞 넓은 공간에 은행나무가 커다랗게 자리한 그곳은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파는 여느 가든의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였다. 내 새끼가 태어났다. 돌잔치야 규모가 큰 곳에서 한다지만 백일을 치르기에 적합한 장소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 집이 떠올랐다. 육고기를 팔던 그 집은 어느새 바다고기를 팔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사라진 그야말로 깔끔한 풍경이었다. 세 살 터울의 두 아들 모두 그곳에서 백일잔치를 펼쳤다.
소주 한 병에 3천 원 하던 시절, 어떤 종류의 고기든 간에 그 집에선 7천 원을 받았다. 그래. 맞아. 이 정도 규모면 그럴 수밖에 없지.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풍경이 달라지듯, 규모가 있는 집안 행사에서 두 배 이상의 술값은 전혀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다. 가족 모두 올곧이 한 공간에서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만큼 그 동네는 박 터지는 곳이었다.
막내 녀석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간 그 식당을 찾은 것은 한 손으로 손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에 걸맞은 이슈가 있어야 했으나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전 그 앞을 지나게 되었다. 검은색과 파란색을 적절히 배색했던 외관이 인상적이었던 횟집은 온 데 간 데 사라졌다. 땅콩 크림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버터 색이라고 해야 할까. 그 은은한 아이보리와 베이지색 중간쯤 되는 색으로 가게는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몹시 세련되고 젊어졌다.
베이글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카페가 그곳에 있었다. 대형카페라 함은 서울 외곽 혹은 지방에나 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내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앞서 주차장으로 사용한 공간부터 2층 테라스까지 예쁜 테이블과 의자가 자리했다. 벚꽃이 한창 흐드러지던 날이라 선선하게 부는 봄바람까지 더해져 그곳은 전혀 내가 알던 동네의 결이 아니었다. 잠시 잠깐 이국적이었고 교외의 한가한 장면에 겹쳐져 고즈넉함까지 불러일으켰다.
걷다가 잠시 멈춰 어딘가를 오래 응시하는 일은 생각만큼 쉽게 자주 연출되지 않는다. 하나 그날 그 순간 나는 그곳 앞에 서서 제법 오랜 시간을 바라봤다. 뭐랄까? 내가 알고 지낸 공간에 전혀 다른 성질의 무언가가 채워져서 약간의 허탈감과 억울함 그리고 박탈감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솔직히 억울할 필욘 없지만 자식뻘 되는 젊은 친구들로 넘실거리는 그 안에 내가 감히 섞이는 것이 어색해버린 시도조차 하지 못한 그 소심함 때문일까. 이유를 떠나 더 이상 나는 젊음을 논할 처지가 아니란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볼일을 보고 되돌아오면서 다시 그 집을 지날 땐 월세가 얼마일까 월 매출이 얼마일까를 계산했다. 머릿속 주판알은 언제부턴가 그렇게 분주할 뿐이다. 계산이 없던 시절이라 행복했던 그날은 내게 다시 오지 않는다.
부모님의 금혼식을 축하한다. 다음 올림픽 전에 나 또한 결혼 20주년을 맞는다. 조금씩 보였던 흰머리는 남산에 잠깐 반짝거린 벚꽃 이상으로 내 머리를 채운다.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같은 공간에 전혀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다행히도 특권일 것이다. 조금 더 지나면 그곳에 어떤 그림들이 연출될지 사뭇 궁금해진다.
인정하고 순응하면서 그만큼 더 배워나간다.
보슬비가 내리는 초여름엔 아내와 단둘이 그곳에서 데이트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