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는 자신 있었다. 남들보다 빠르진 않고 오래 달리진 못했지만 수시로 달렸다.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달릴 수 있을 땐 무조건 달렸다. 느리게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달리는 그 순간, 나는 젊고 살아있음을 느꼈다. 달리는 행위는 내게 아직 숨 쉬고 있다는 일종의 해답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달리는 횟수와 시간이 과거에 비해 점차 줄어든 어느 날, 아내는 내게 이제 근력 운동을 해야 할 때라고 부추겼다. 구청에서 운영하는 제법 규모가 큰 곳 헬스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유산소 운동은 자신 있었으나 기구를 이용한 웨이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다. 굳이 할 이유가 없었다. 엉거주춤 그리고 운영자의 조언을 바탕으로 조금씩 조금씩 운동을 늘려나갔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이제는 계절을 달리했다. 미묘한 수준이나 몸 곳곳에 붙은 근육이 달리기를 즐기는 내 취미를 더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돈과 시간을 들여 운동하는 것을 오래전부터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내 고집이 그렇게 서서히 꺾여나갔다.
운동하는 공간의 풍경은 은근 재미가 있었다. 40대 중반인 내가 거의 어린이 수준이 될 정도로 평균 연령은 무척 높았다. 거주하는 공간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새벽과 한낮, 그리고 저녁 등 대부분 세 시간대를 경험하는 것을 바탕으로 둬도 분명 나는 꼬꼬마다.
며칠 전 염색을 한 듯 까만 머리와 활력 넘치는 기개로 땀을 흘리는 50대와 60대, 인생을 달관한 듯 많이 느리고 가벼운 느낌이지만 꾸준히 운동하는 것을 즐기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70대, 그리고 어쩌면 운동마저 소일거리가 된 듯 그곳에서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운동을 하지 않고 기구에 잠시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등 일상의 여유 시간을 보내는 80대까지... 물론, 내 자식 뻘 되는 20대 초중반의 싱싱한 움직임도 가끔 보인다. 그야말로 아주 가끔이다.
몸에 근육을 붙이기 위해 기구를 사용하면서 결국 무거운 중량의 물체를 중력을 거스르며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리는 행위는 지루함과 동시에 즐거움을 전해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지 싶어 괜히 혼자 토라지다가도, 또 하면 할수록 중량이 늘어나고 몸에 땀이 맺히는 순간의 희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15kg으로 시작했던 초창기와 달리 이제 25kg에서 컨디션 좋을 땐 30kg도 거뜬하게 소화하는 스스로를 보며 연습만큼 정직한 지름길도 없음을 매 순간 느낀다.
중력을 거스르는 행동은 결국 세월을 거스르기 위한 도전의 일환으로 이어진다. 세월을 거스르는 것은 엄밀히 말해 불가능한 일. 각자에게 주어진 세월이란 시간의 흐름을 조금 늦추는 노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 조금 더 건강하고 활력 넘치는 신체를 위한 즐거움과 만족도를 위해 그들은 그곳에서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생로병사라는 지극히 당연한 자연의 섭리를 때때로 외면하고 싶을 만큼 아찔한 순간들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손을 휘둘러 날아다니는 작은 초파리 하나 잡아 내동댕이 치면 어느 순간 미안한 마음과 죄스러운 마음이 겹치기도 한다. 젊고 늙고의 차이는 시작점의 차이일 뿐. 지금 현재라는 시점에서는 그 차이의 연장일 뿐. 새하얀 머리로 스스로 감당 가능한 중량을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그들의 노력은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몸으로 보여주는 해답이 된다.
틈틈이 내가 뛰었듯이. 번갈아 움직이는 두 팔과 두 다리. 그리고 빠르게 뒤로 흩어지는 풍경을 가로지르는 맛. 그 속도의 맛 대신 근육이 들어차는 쾌감을 일궈나간다. 늙어가는 일. 그리고 건강을 유지하는 일. 내게 주어진 세월의 흐름을 조금 늦추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