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ㅣ 양창모 ㅣ 한겨레출판사
흘러간 대중음악 가요에 자주 등장했던 상황이 있다. 애인의 중요한 이야기를 다른 친구에게 들어서 오해가 생기고 다툼이 생기고 헤어지거나 다시 화해하는 류의 장면이 떠오른다. 오래전 내 기억 속에 있었던 그의 이야기를 어느 방송 작가의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동명이인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몇 장을 다시 거슬러 올라 그 부분을 읽고 또 읽으니 글자에서 그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서둘러 검색을 해보았고 그의 책이 다행히도 자주 찾는 도서관에 비치된 것을 알게 됐다.
그는 강원도의 왕진 의사 양창모였다.
나이로 치면 나보다 열 살 즈음 위 형님이다. 라디오 애청자 모임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고맙게도 그는 내게 선의를 베풀었고 내가 가진 잠재력을 높게 평가해 주었다. 거처가 서울이 아니었기에 자주 보지는 못했다. 그렇게 십수 년 연락이 뜸해졌고 모임도 허공에 사라져 잊힌 사람으로만 남았다. 이후 그와 나의 교차점에 있는 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아주 잠깐 얼굴을 본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그를 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왕진 의사'라는 단어가 생소한 시대에 살고 있다. 팔도 강산에서도 가장 험난한 강원도였다. 그는 그곳에서 의사라면 해야 할 그리고 사람이라면 해야 할 그의 소명을 펼쳐나가고 있었다. 많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토록 글 한 줄 한 줄에 진심이 실리고 많은 생각과 고민이 담긴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인간이라면 태어나 나이가 들고 병들어 고통을 받다가 죽는 것이 지극히도 평범한 일인데, 그는 그 현장을 책을 통해 내게 그리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충분히 짐작할 만한 풍경이 펼쳐진다. 책은 그곳에 계신 사람에 대해 들려준다. 아픈 사람, 그리고 그들을 찾아가는 사람. 현실적인 문제와 제도적인 문제, 그리고 그 안에서 저자의 관점에서 놓친 것들과 애착을 두는 것들로 흐른다. 활자가 갖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이 책에서 등장한다. 첨단 문명과 안락한 인프라가 갖춰진 도시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불과 한두 시간 거리에서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우리가 사는 이 나라는 작지만 어떤 면에서는 정말 크다. 한 곳은 너무 많은 것들이 밀집되어 있고, 그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곳은 너무 허전하고 빈약하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봉사'라는 행위를 반가워하진 않는다. 내 코가 석자인데 봉사를 할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나 자식을 만나고 어떻게든 사회적 인간으로 조금이나마 동참을 해야겠단 다짐으로 얼마 안 되는 용돈에서 일부를 매달 후원하는 것으로 나름의 선을 그었다. 왕진 의사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아마 후원마저 안 했으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펑펑 울었을지 모른다. 그에게 그리고 세상에 조금이나마 미안한 마음을 그것도 아주 조금씩이나마 대갚음한 마음이 들었다. 하나 여전히 미안한 마음은 유효하다.
그렇다고 왕진하지 않는 의사가 훌륭한 의사는 아닐 것이다. 그 역시 책에서 밝힌 부분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역할이 있다. 그리고 위치가 있다. 그는 지금 그곳에서 강원도 산골 오지를 다니며 어르신들을 보살피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는 것을 행운이라고 책을 통해 이야기한다. 낯설게 느껴진 그 한 줄의 문장이 책을 모두 읽고 나서 강한 울림으로 내게 전달되었다. 그 어떤 여운보다 정말 긴 울림이었다.
내 부모님, 아내의 부모님, 형제와 자식, 친구와 지인들... 관계를 맺은 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언젠가 늙고 병들어 죽는다. 급작스러운 사고가 아닌 이상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더 건강하게 살아야 할 책임도 있고, 나보다 먼저 삶을 등지는 이들을 잘 보내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의 책을 통해 나는 숨 쉬는 당연한 일부터 주변을 살피는 약간의 관심을 더해야 하는 일까지 그 모든 것을 배웠다. 깨닫고 느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곧 그와 조우할 것이다. 펑펑 울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눈물이 흘러도 어쩔 수 없다. 할 말은 조금 미뤄둔 채 어리광 부리고 응석 부려도 그가 받아주리라 감히 짐작해 본다. 교차점에 있던 지인의 죽음이 그를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었으나, 다시 그를 보게 될 때 그날은 누군가의 죽음이 아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우리만의 축제의 장소이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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