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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어요

울고 싶은 건 난데... 하늘이 대신 울어주는 날.

by 반차

언니가 병원에 입원한 다음날이었다. 서울로 올라오기 위해 공항에 가는 길에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폭우가 내렸다. 하수시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비가 내려 도로에 물이 가득 쌓여있었다. 터널에 내려가면 전복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언니를 병원에 두고, 허전한 집에 부모님을 두고 비가 많이 오는 도로를 달리고 있자니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마지막 장면처럼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발 시간에 늦을 것 같았다. 혹시나 비 때문에 비행기가 연착되어 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폭우는 무척이나 국소적인 지역에만 내렸다. 마치 내 머리 위에만 구름이 떠 있는 기분이었다. 공항 근처에는 비가 오지 않아 비행기는 제시간에 맞춰 출발했다. 결국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억울했다. 어쩔 수 없이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

기차 안에서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의 인생이 마치 내 전생 같았다. 이곳이 나의 현실이고 서울에서의 생활은 꿈같았다. 당시 나는 오랫동안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휴가로 인해 그 공모전 마지막 회의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공모전엔 끝내 참가하지 못했다. 언니의 보호자로 살며 내 기회가 적어질 것을 예상했지만, 새삼스레 피부에 와닿았다. 힘들었던 4일이 앞으로 내 인생의 예고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억울한 마음이 피어올랐다.




서울에 도착해서 바로 회사 후배와 술을 한잔 했다. 평소 친한 후배였다. 나는 후배에게 쏟아내듯 그간의 일을 말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이때쯤 나의 우울증이 나아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전까지는 힘든 일이 진행되는 와중에 누군가에게 이를 말하는 것을 전혀 하지 못했는데, 이날만큼은 토하듯 모든 말들을 털어냈다. 뭐라고 말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질까 봐 애써 밝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후배는 나를 보며 "멘털 좋다"라고 했다. 이맘때부턴 진짜 내 멘털이 좋은 건지 멘털이 좋아야만 하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후배에게 말하고 있으니 이 이야기가 내 일이 아니라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이를테면 인간극장이나 다큐 3일의 출연자 같이 말이다.

한참을 쏟아내고, 후배의 담담한 눈빛을 보니 내가 서울에 온 것이 실감 났다.

'아 내 인생이 여기 있었지'

그때 내 마음은 안도감 와 걱정, 그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징그럽게도 반복될 일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다는 것. 그 사실이 묘하게 나를 안심시켰다.




언니가 입원을 할 때 휴대폰을 언니에게 줄 수 없었다. 휴대폰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 많았고, 그로 인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 명의의 휴대폰을 정지하기로 약속한 이후에 입원을 진행했다. 입원 후에는 언니가 기억하는 몇몇 사람들에게 공중전화로 전화를 거는 것이 언니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전화 몇 통이 언니에겐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그것이 애처롭고 안타까웠다. 외부와의 단절이 외로움을 더 크게 만들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병원에 있으며 언니가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전화를 놓지 않으려 애썼다. 친구와 밥을 먹다가도 언니에게 전화가 오면 자리를 비워 전화를 받으러 갔다. 그런 나의 모습에 스스로 현타가 왔다.

언니는 이따금씩 전화를 걸어 병원 사람들에 대해 말하거나 밥이 맛이 없다며 투정을 부렸다. 이젠 정말 언니가 내 딸처럼 느껴졌다. 나는 궁금하지 않은 안부를 묻고, 힘이 없지만 다정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걸까? 이것을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언니와 그동안 왕래 없이 지냈는데, 참 짧은 순간에 인생이 180도 변하기도 하는구나 새삼 느꼈다.




우연히 내가 언니 이름 앞으로 기업전화가 개통되어 있고, 그것이 보이스 피싱으로 신고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사실이 있는 걸 알고 있었냐고 언니에게 물었다.


"아니. 처음 듣는데"

언니가 답했다.

나는 재차 물었다.

"진짜 모르는 사실이지?"

"진짜라니까!" 언니가 무구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전까지 당한 사기는 교묘하게 법을 피해 가서 신고가 불가능했다. 세상에 교묘하고 나쁜 사람은 너무 많았고, 나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짜증 났다. 그러다 드디어 신고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아주 잠깐 희망의 빛을 본 것처럼 말이다. 부모님께 이를 말씀드렸고, 외출이 가능한 날짜에 통신사와 경찰서를 방문해 신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말씀드렸다. 부모님도 이 사실을 듣고 조금은 개운한 듯 보였다. 얽히기만 하던 실타래를 풀 방법이 보인 듯했다.



시간이 흘러 언니의 첫 외출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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