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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책임이 없는 자유는 자살이다.

by 반차

언니의 외출날이었다.

부모님은 연차를 쓰고 명의 도용 신고를 위해 통신사와 경찰서를 뛰어다녔다. 통신사 업무는 대리점에서 볼 수 없어 직영점을 찾아 가느라 이곳저곳을 바쁘게 옮겨 다녀야 했다.

통신사에서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본인이 직접 인증을 해서 개통한 건이기 때문에 신고가 불가능하다는 것.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재차 물었을 때 언니는 분명 모르는 일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직접 본인 인증을 했다니...

참 황당했다. 통신사의 기록이 잘못되었을 것이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언니의 거짓말이었다.

허탈했다. 우리는 13살 아이의 거짓말에 놀아나고 있었다. 회사에서 마음 졸이며 전회를 기다린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순진하고 착한 줄 알았는데 이런 면도 있다니. 내 앞날이 정말로 막막했다.

나는 인내심이 동나버린 채로 말했다.

부모님이 연차를 쓰고, 나도 서울에서 애 닳고 있고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데 거짓말을 할 수 있냐고.

쏘아붙이는듯한 내 말에 언니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내가 신고해 달랬어?"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듯했다. 적반하장이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다 포기하고 싶었다.

가족같이 유대관계가 완전히 깨어져버렸다. 언니가 우리를 똥개훈련을 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엄마가 쓰러질까 봐 걱정이 되어 말하지 못했다고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나는 애써 차분하려 했지만, 날 서게 말했다.

"엄마가 쓰러지는 건 걱정되고, 남은 사람들 뺑뺑이 도는 건?"


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불리할 때는 입을 열지 않는다.


침묵이 지나고 언니가 말했다.

"내가 개통해 준 거 맞아"

이 사실을 왜 지금까지 말해주지 않은 걸까. 나를 못 믿는 걸까. 아니면 나보다 더 믿을 만한 구석이 있는 걸까.

그 거짓말 하나에 부모님과 나는 한창 마음 졸이고 있는데...




처음 이일을 알게 되었을 때 경찰은 단호하게 말했다.

"전형적인 사기 수법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따님분이 범죄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며칠 후 방문한 가족 상담센터의 선생님도 그랬다.

"이 친구는 13살인데, 그냥 13살이 아니라 이미 엇나갈 대로 엇나간 말썽꾸러기입니다. 이런 경우는 감방에 갔다 와야 정신 차려요"


이 말을 들은 아빠는 분개했다. 부모로서 자식을 그렇게 둘 수 없다, 내 자식은 다르다 생각하셨겠지.

나도 말만 잘하면 언니를 금방 바꿀 수 있을 거라 안일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더 이상 어떤 말을 언니에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정말이지 막막했다.

사기꾼들은 달콤한 말들로 언니를 현혹시켰지만 결국은 언니를 감옥으로 몰고,

가족들은 차가운 말들로 언니에게 상처를 줬지만 끝내 따뜻한 집으로 돌아오길 바란다는 사실을 언니는 알까.


이때는 언니를 어떻게 대해야 좋은지 부모님도 나도 알지 못했다. 언니와의 대화는 매번 어긋났었다. 부모님은 감정도 상하고 속도 상하는 눈치였다. 언니가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여러 장치들을 마련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던 우리의 기대도 무너졌다.


언니가 범죄자가 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은 어쩌면 오만이었는지 모른다. 솔직한 심정으론 언니가 그냥 감옥살이를 하는 게 맞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가만히 두면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는 건데 나만의 잣대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우기며 내가 방해하는 걸까 생각할 정도였다.



나는 취직 후 제대로 쉰 적이 없었고, 워킹홀리데이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늘 품에 안고 살았다.

눈앞에 언니를 보니 '나의 생각들이 헛된 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언니가 병원을 벗어나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것조차 헛된 꿈처럼 보였다.


입원 며칠 후, 부모님은 의사의 전화를 받았다.

"환자분은 스트레스 없이 잘 적응하고 있다." "스트레스는 크지 않다"

의사가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무너져 내렸다.

내 마음이 다 닳는 동안, 언니는 그랬구나.

스트레스가 없다니 다행이지만, 내 고생을 생각하니 괜히 억울해지고 언니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따금씩 언니를 향한 원망이 지났다.


언니의 전화를 받을 때면 귀찮아도 이것저것 물으려 했다. 신나서 말이 빨라지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아이이다.

'아. 내가 이 어린 영혼에게 무슨 나쁜 생각을... '



그동안 언니는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책임이 없는 자유 속에 살았다.

책임이 없는 자유는 자살행위다.

나는 언니의 거짓말이 무서워서인 줄 안다.

하지만 그것은 거의 매번 나를 미치게 했다.

이 말썽꾸러기 꼬마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이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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