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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 후에 뵙겠습니다.

짧고도 길었던 병원생활의 끝

by 반차

다행스럽게도 부모님은 상담에 큰 거부감이 없으셨다. 특히 아빠는 한순간에 확 바뀌었다. 책까지 읽어가며 열심히였다. 물론 언니의 상태를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지만. 늘 조급하고 욕심이 많던 엄마도 언니에게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되었다. 상담을 받은 건 분명 큰 도움이 되었다.




언니에게 이따금 전화가 왔다. 평생 병원에 있을 것을 무척이나 두려워했다.

처음 들어갈 때 한 달만 있자고, 잠깐 있다가 나오면 된다며 언니를 설득했다. 언니는 순진하게도 그 말만 믿고 입원에 동의를 했다. 하지만 막상 입원을 하니 오랫동안 입원한 환자들이 많은 것이다. 그 사람들을 보니 꼭 자신의 미래 같아 걱정이 되었나 보다.


물론 부모님과 나도 그것을 걱정했다.

나는 어쩌면 언니가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평생을 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래서 언니의 전화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나 언제 나갈 수 있어?" 하는 순진한 말은 들을수록 마음이 아렸다.

나와 언니는 결코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솔직하게 난 언니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래서 언니에게 냉정하게 굴 수 있을 거라 자만했다. 하지만 13살짜리 어린아이에게 냉정하게 구는 것은 어려웠다. 피가 섞인 것이 참 무섭기도 하지. 나도 모르게 언니에게 마음을 쓰고 있었다.


부모님께 전화할 때는 "나 퇴원시켜 줘. 엄마아빠만 동의하면 나갈 수 있대" 하며 보채는 말을 했나 보다.

그 말을 듣는 부모님의 마음은 어땠을까. 안쓰럽고 가여웠겠지. 어쩌면 죄책감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비어버린 언니의 방과 언니의 말에 부모님도 분명 마음고생을 했으리라.




언니는 이따금씩 병원 생활 이야기를 해주었다.

임상 선생님이 차가운 인상을 가진 이야기, 다 같이 TV를 보는 이야기, 밥이 맛없어서 간식을 사 먹는 이야기, 다른 사람들이 먹는 과일이 탐난다는 이야기, 알코올 중독자와 대화한 이야기 등등.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정신병원에 가지고 있던 편견도 조금씩 사라졌다. 바깥에서 수많은 위험을 경계하며 불안에 떨던 언니는 비로소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루틴 한 생활과 수면제가 큰 도움이 되었겠지. 그때의 언니에겐 제때 일어나고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는 생활이 너무나도 생소했다. 돌이켜 보면 병원 생활이 꼭 필요하던 시점이었던 것 같다. 언니도 차츰 경계심을 풀고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다.


아빠의 변화는 언니의 안정에 특히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전에는 언니를 무척 답답해하고 무작정 나무라던 아빠였다. 몰아세우고 화를 내기 일쑤였다. 이해가 도저히 안 된다며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언니를 떠올리면 혼나고 있는 모습이 가장 먼저 생각날 정도이다.

아빠는 상담을 계기로 언니가 정말 13살이라는 것을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물을 엎질러 버린 것을 나무라기보다 물을 함께 닦아주는 편을 택했다.

아빠의 노력에 언니도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입원한 지 딱 한 달이 되던 때였다.

영영 가까워지지 못할 것 같았던 언니와 부모님의 관계가 좁혀지고 있었다.

마침내 언니도 부모님의 걱정을 애정으로 여기는 듯했다. 경계선 지능인은 치료라는 개념이 딱히 없기 때문에 입원이 능사가 아니다. 자살 충동이 크지 않다면, 입원은 오로지 사회와의 격리의 기능을 하는 정도였다.

부모님은 언니를 24시간 통제하지 않아도 신뢰를 쌓아갈 수 있다는 판단을 했고, 퇴원을 결정하셨다. 그간 걱정이 무색했다. 앞으로 많은 과제가 있겠지만 우선은 함께하는 것을 택했다.


먼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지금 당장 비어버린 언니의 마음을 채우는 것.

앞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연료를 채워주는 것. 가족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언니의 인생이 늘 즐겁진 못하더라도

자기 전에 웃으며 떠올릴 기억이 많으면 좋겠다.

그래서 힘든 날에도 내일을 기대할 수 있도록.


혼자 우는 날이 있더라도

언젠가 함께한 기억을 떠올리며

스스로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사랑받지 못한 시간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면 좋겠다.

그렇게 따뜻한 세상에서 불안 없이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

언니가 평안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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