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접어드는 계절 전남 백양사를 방문했다.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국립공원이 내장산, 백암산, 입암산 세 개의 산을 통틀어 지정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장산에는 내장사가 백암산에는 백양사가 자리 잡고 있는데 두 사찰 모두 백제 무왕시절에 창건된 유서 깊은 절이다. 물론 세월의 풍파 속에서 불타고 중건되면서 온전한 옛 모습을 찾기는 어렵지만 깊은 마음을 안고 깊은 산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예나 지금이나 끊이지 않는다.
지난번 백양사를 찾았을 때도 참 아름다운 절이라 생각했는데, 이번 방문에는 가을 푸른 하늘과 여름 초록 나무 그늘을 담은 잔잔한 못과 그 풍경을 한눈에 아우를 수 있는 쌍계루가 절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초록빛 사이 간간히 어우러지는 주홍빛 꽃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푯말이 있어 살펴보니 백양사 부근에서 처음 발견된 꽃이라 백양화라고 한다고 나와있다. 백양사 근처에서 발견되었다고 단순히 백양화라고 했다니!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다. 푯말을 만들면서 으레 최대한 쉽게 설명하기 위해 사설을 기입해 놓는 경우가 많으니 그런가 보다 했다.
한 번 눈에 들어오니 백양사 담벼락에서도 쉽게 백양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상사화와 같이 잎 없이 꽃자루 끝에 꽃만 피어 있는 모습이 가느다란 빨간 꽃무릇(석산)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고, 열대 식물 꽃처럼 화려한 주홍빛의 꽃이 이국적이기도 하다. 찜찜한 마음을 안고 집에 돌아와 백양화를 검색해 보았다. 백양화 또는 백양꽃, 개꽃무릇이 정식 이름으로 나와있다. 또 백양사 또는 백양산에서 발견되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지리산오갈피 같은 경우에는 학명에도 지리산(Eleutherococcus chiisanensis)이 표기되는데 백양화는 한국을 뜻하는 Koreana(Lycoris sanguinea var. koreana)만 붙어 있다.
발견된 장소를 따서 식물 이름을 붙이는 것은 흔한 일이고 특히 유명한 '백두', '지리', '한라', '금강' 산 이름이 들어간 식물이 많다. '한라'만 해도 한라고들빼기, 한라솜다리, 한라부추, 한라개승마, 한라송이풀 등 여러 이름이 즐비하다. 이렇게 유명 산 이름을 붙인 식물 이름은 어색하지도 않고 성의 없이 이름을 지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백양화만 유독 서운한 생각이 드는 연유는 무엇일까? '백양'이란 이름이 붙은 식물이 흔치 않기에 때문에 생긴 낯섦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친김에 국립수목원 국가표준식물목록 홈페이지에서 백양을 검색해 보았다. 자생식물로 백양꽃과 백양더부살이가 검색되었다. 이름에 백양이 붙은 식물이 하나 더 있다는 기쁨도 잠시 백양더부살이는 멸종위기야생생물 II급이라 평생에 한 번 볼 일이 없을 것 같다.
새로운 사물이나 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나름의 고뇌가 필요한 일이다. 새로이 브랜드를 출시하거나 제품을 시장에 선보일 때, 내 가게를 오픈할 때 쉬운 이름이든 어려운 이름이든 고민의 결과로 새 이름이 지어진다. 게다가 나의 감정이 투영된 애칭이라면 그 고민은 더욱 심각해진다. 좋아하는 사람을 부르는 말, 뱃속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태명뿐만 아니라 내가 매일 타는 차, 내가 즐겨 쓰는 펜, 요즘 자주 쓰는 AI스피커까지 일단 이름이 붙고 나면 애정이 쌓이고 사물에도 숨이 붙은 것 마냥 느껴지는 것은 사람의 타고난 공감 능력 때문일 것이다. 내가 블루투스 서비스를 처음 개발 했다면? 백양꽃을 처음 발견했다면 어떤 이름을 붙여 주었을까?
요즘은 SNS서비스를 이용하며 닉네임을 사용하고 수시로 바꾼다. 단순한 닉네임이라도 스스로 또는 타인에게 전하는 메시지임은 분명하다. 내 닉네임을 한 번쯤 살펴보고 현재 나의 상태를 점검하고 다독이며 공감해 주는 시간을 갖는 것은 온오프라인에서 바쁜 일상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필요한 일이다. 지금 당신은 스스로에게 애정 넘치는 말을 건네고 있나요? 자신감 넘치게 응원해주고 있나요? 반성의 다짐을 하고 있나요? 마지막으로 나는 애정을 담아 백양꽃을 녹음 사이 숨어 피는 아름다운 별과 같다는 뜻으로 '주홍별꽃'이라 불러주고 싶다. 당신을 위한 애정이 듬뿍 담긴 별이름 하나쯤 마음에 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