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금나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직장 후배의 어머님이 만들어 주신 정금나무 쨈 덕분이었다. 새콤한 맛이 달달한 맛과 어우러진 진보라빛 쨈을 말랑한 모닝빵에 발라 한입 먹으면 그 뒤로 주체하지 못하고 한없이 먹게 되는 맛이었다. 정금나무 열매를 생으로 먹어본 적은 없지만 신맛이 훨씬 강한 블루베리 맛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 본다.
정금나무를 검색해 보면 토종 블루베리라는 문구를 흔히 찾을 수 있다. 정금나무 열매를 오래전부터 흔하게 먹었다면 '서양 배'를 우리나라 배와 구분 지어 부르듯 오히려 블루베리를 '서양 정금'이라 불렀을 것이다. 다래를 '토종 키위', 으름을 '토종 바나나'라 칭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상황이다.
우리가 즐겨 먹는 뉴질랜드의 키위는 사실 뉴질랜드 전통 과일이 아니다. 1904년 뉴질랜드 선교사 이사벨 프레이저는 중국 양쯔강 유역 한 야산에서 다래를 발견하고 다래 씨를 채집했다. 그녀는 귀국 후 처음으로 뉴질랜드에 다래를 심었고, 식용보다는 덩굴로 그늘을 만드는 정원수로 심었다고 한다. 그리고 열매 모양이 서양까치밥나무 열매(구스베리)와 비슷하여 '차이니스 구스베리'라 이름 붙였다. 그 후 뉴질랜드 원예학자인 헤이워드 라이트가 10년 넘게 품종 개량하여 크고 당도가 높은 개량 키위를 만들어 '키위프루트'란 새 이름을 붙였다. 키위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뉴질랜드 정부가 참전병사의 사회복귀 프로그램으로 과수원을 권장하면서 뉴질랜드 대표과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또한 1950년대를 기점으로 전 세계로 키위가 수출되면서 다래에서 비롯된 새로운 키위라는 과일 품종은 널리 소비되고 있다.
단지 과일에 불과한 키위이지만 키위가 탄생하고 널리 알려지기까지 5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여러 사람의 관심과 사회적 흐름, 국가적 투자가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직접 겪어보진 않았지만 우리나라도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 토종 과실류를 품종개량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6.25 전쟁 후 식량작물인 벼 개량에 힘을 쏟았고, 과실류로는 사과와 배를 우선적으로 육종 하였다고 한다. 이후 복숭아와 포도, 귤, 딸기 등에서 새로운 품종이 탄생하고 있지만 뉴질랜드의 키위와 같이 기존에 없던 새로운 과일로서의 국가적 대표 상품은 아직 없다.
의식주가 해결된 현대사회에서 새로운 과일에 대한 열망은 건강과 맛을 중요시하는 관점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한동안 국내에서 샤인머스캣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고가에 판매되었다. 하지만 샤인머스캣은 우리나라 품종이 아니라 일본 히로시마 농업연구소 포도 연구 센터에서 1988년 교배해 2006년까지 18년에 걸쳐 육성된 품종이다. 다행히 일본이 별도로 품종 등록을 하지 않았기에 국내 농가는 일본에 사용료를 내지 않고도 샤인머스캣을 재배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재배가 확산되며 가격이 하락하여 이제는 대중적인 과일로 분류되기도 한다.
정금나무는 야생에서 드물게 발견되긴 하지만 실제 재배가 가능한지 정보가 없다. 다행히 요즘엔 가을에 물드는 붉은 잎이 매력적이라고 알려져 정원수로 심고자 묘목이 유통되기도 한다. 정금 열매가 완두콩 정도의 크기이니 정금 열매가 키위처럼 마트에서 편하게 사 먹을 정도로 대중화되려면 크기도 커지고 단맛도 더 보강되어야 할 것 같다. 아쉽게도 정금나무는 아직 대중화 과일이 될 수 있는 여정을 시작하지도 못한 듯하다.
정금나무가 우리 과일이라는 사실이 잊히기 전에 이곳에 한 줄이라도 더 남겨두고 싶다. 정금 열매의 싱그러운 신맛을 글로는 다 전하지는 못하지만, 정금나무의 은방울꽃 같은 올망졸망한 꽃의 사랑스러움과 여린 잎사귀를 투과하는 햇살의 찬란함을 전하고 싶다. 정금나무는 나무 전체의 큰 특징이 없어 산길에서도 그냥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야산의 다래를 그냥 지나치지 않은 뉴질랜드 선교사 이사벨 프레이저와 같이 우리도 작은 풀 한 포기에도 관심을 가져보자! 산 중에서 알아보았던 열매가 먼 미래에 전 세계로 수출하는 우리나라 대표 과일이 되어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어떤 분야의 대표가 된다는 것은 수 많은 험난한 여정을 거치고 이겨낸 결과값이다. 결과의 달콤함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시간과 노력의 과정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물며 과일 품종에도 키위의 뒤에도 50년, 샤인머스캣은 35년 이상의 노고가 들어가 있다. 하지만 그 여정의 시작은 사소한 관심이고, 오늘 아침 이부자리 정리, 커피 한 잔 줄이기, 일기쓰기와 같은 작은 단위의 행동에서 시작한다. 겁내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가보면 내 인생의 대표로 당당히 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