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딩때
"미래소년 코난"에 열광 했고
연이어
TV에서 방영한
명탐정 홈즈에
환장 했었다.
그러다 고딩때
불법 비디오로
보게 된 토토로를
필두로,
마녀 배달부 키키,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붉은 돼지.라퓨타 등등..
대사도 몰라 뭔 소린지도
모르는 그 비디오들에
얼마나 빠져서
계속 봤던지
엄마한테 잔소리 꽤나
들었었다.
“니는 뭔 소린지도 모르는
그걸 도대체 몇번이나 보는기고?”
반면,
내가 하도 보다 보니
강제로 옆에서 듣게 되신
엄마가 나물을
다듬으시며
“쟈들은 말하는기 천상
노래하는거 비스무리하이
참 간드러지네”
라고 하셨던 기억도 있다.
나도 이때 즈음 부터
일본어의
“소리”자체에 큰 매력을
느껴 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냥 얼치기
번역 일 정도는
할 수 있는 위치가 된 듯 하다.
그렇게 미야자키 하야오에
환장하던 나인데
이 글 제목은 왜 저런 것일까?
점점 일본문화에
빠져들던 나는
스펀지 처럼
그 문화를 흡수해갔고
그러다
NHK에서 지브리가
만드는 영화 마다
나오는 다큐를 보기 시작했다.
DVD초기 시장 시절에는
이 다큐가 정발 DVD 서플먼트에
포함 되기도 했었는데
DVD시장이 죽고
발매가 늦어지자
뭔 수를 써서라도
이 NHK다큐는
지금 까지 나온 것을
다 챙겨 보게 되었다.
사실 20대 후반 정도 부터는
미야자키 할배의 영화 자체 보다는
이 다큐가 훨씬 재미 있었다.
할배는 작업에 들어갈때
자기도 엔딩을 정하지 않은
상태로 시작 하는데
이게 내가 영화 보는 취향과는
너무 동떨어 져서
그나마 가장 최근에
괜찮게 본 것이
“센과 치히로”정도이고
그 뒤로 재미있게 본 것이 없다.
이 즈음에서
실드 겸,
내가 욕은 하지만 할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부터
깔아 놓고 가겠다.
작년인가 재작년에
할배의 스승
타카하타 이사오(반딧물의 묘지
감독)
의 장례식에서 할배가 추도문을
읽는 영상을 보고 울었다.
할배가 대본이 아닌,
직접 쓴 추도문을 울먹이며 읽는데
도저히 울음을 참을 방법이 없었다.
정말 명문이였다.
어찌 저찌 만나 내게 도움을
많이 주셨습니다.
이런 뻔한 나열이 아니라
빗방울이 약간 떨어지는
해질녘 노을 속의 버스정류장에서..
이런식의 묘사가 들어가는데
와..울지 않을 재주가 없는 명문이였다.
그리고 앞서 말 했다시피
다큐도 전부 찾아볼만큼 팬이였던
나는 왜 그를 혐오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다름아닌,그 다큐들 때문이다.
(이하의 내용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팬이시며
그들에게 나쁜 내용의 글을 보기 싫으신
분들께 추천하지 않습니다.
보지 않으시면 서로 기분 상할일이
없을 듯 합니다)
어떤 업계의 정점에 오래 있다보면
사람이 변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는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NHK 다큐를 보더라도
동네 하천에 쓰레기를 줍거나
근처 유치원 어린이들과
인사하는,그야말로
사람 좋은 사람으로 비춰지지만
그 사이사이에
숨기지 못한 진실이 슬쩍 슬쩍 보인다.
꽤 예전 다큐 였을텐데
거기서 한 스텝에게
“그 따위로 할거면 집에 가라!”
라고 호통 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 하나로 사람을 판단할 순 없지만
카메라가 찍고 있는걸 알면서도
저렇게 폭력적인 언사를 했다는 것으로
평소에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으며
그것은 큰 사건이 되어 나타났다.
내가 지브리 작품 중
꽤 좋아하는 작품이
“귀를 기울이면”이다.
나는 판타지 작품이 싫은게 아니라
지브리 작품중 판타지 영역이 싫다.
귀를 기울이면.은 일본의 현대 생활을
사실감 넘치게 묘사하다가 후반에 가서
내가 싫어하는 그 판타지 분위기로 흘러
안타깝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파트가 많아 좋아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할배가 감독하지 않았다.
이 작품의
감독은 “콘토 요시후미”라는
사람이 했다.
이 작품이 1995년작이니
할배는 이때 이미 은퇴 발표를 한 것이며
그 후,30년간 은퇴 번복을 계에속
반복했다.
할배 입 안의 혀 처럼 구는
지브리의 PD 스즈키 토시오가
가장 최근 SBS와 한 인터뷰 영상을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거짓말쟁이다”
라는 직접적인 증언이 나온다.
그런데 “귀를 기울이면”을 감독한 콘도 요시후미는
본 작품 개봉 몇년 후,
47세의 나이에 사망한다.
이 사망에 대해
미야자키 스스로가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고 발언하는 것이
NHK다큐에 나온다.
“멀쩡하던 사람이
작품을 마치고 급작스럽게
상태가 나빠지더니 죽었다”
며..
감독”직”만 콘도에게 주고서는
그야말로 선 하나 하나 마다
옆에서 쥐잡듯 사람을 들들 볶은 것이다.
미야자키는 천재다.
천재 눈에 다른 사람의 실력이
만족 될리 없었고 뭘 하든
다 불만이였을 터.
그렇다고 그렇게나 들이 볶아 대서
결국 사람이 죽은 것이다.
이런 사실을 본인이 스스로 인정하는데야
나도 생각이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아예 이 할배에 대한
인식이 확정 나는 사건이 일어난다
“바람이 분다”
2013년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전부터 한국 언론에서도
이미 말이 나왔었다.
이전까지 반전,반핵을 주장하던
할배가 완전 그 반대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소식이였다.
할배빠인 나는 신중했다.
보고 판단 하기로 했고,
보고 나서 난 할배를
혐오하게 되었으며
지금 까지 할배에 대한
내 평가는 변하지 않았다.
아니,최근작”니들 우째 살래?”에서
더욱 혐오 스럽게 바뀌었다.
할배는 이 영화 이전에
2차 대전때 군용 비행기 부품 업체를
운영했던 자신의 아버지를
비난 하며 반전 운동을 했다고 했었다.
그런에 이 영화 내용은
무슨 암시나 복선 따위도 없고
아주 간단 명료하게
“이 비행기로 뭘하든 내 알바 아니며
나는 비행기가 너무 좋다!”
는 주인공을 묘사한다.
그 비행기는 자살특공을 했던
“제로센”이라는 비행기이다.
이제까지 반전 장사를 해먹던
할배가 갑자기
빤스를 내린 것이였다.
어질 어질할 정도로 어이가 없다.
그 당시에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라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논란이 있었는데,이것을
실드 치는 쪽의 주장은 이러하다
“야,그걸 그대로 믿냐?
이게 다 반어법이다.할배가
그럴리가 없잖아?”
이래서 그런말이 나왔나 보다
“유명해져라.그러면 똥을 싸도 숭배할 것이다”
어떤 영화 문법에 영화 전체를
반어법으로 쓰는 것이 있나?
예를 들어 반전 메세지를 담은
영화라고 해보자.
반전 메세지를 담은 영화가
첨 부터 끝까지
전쟁광이 나와서
“전쟁 최고~!”
노래를 부르며
학살만 하다 끝났다.
그런데 이건 전쟁 찬양
영화가 아니라 반전 메세지를
담기 위한
“반어법”이다.
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백보 양보해서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독일에서 똑같이
“난 이 잠수함으로 뭘 할진 모르고 잠수함이
너무 좋아!”
라며 U보트 만든 사람의 영화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세계적 비난을 피할길이 없었을 것이고
감독의 활동은 더 이상 불가능
할것이다.
내가
이래서 선을 넘었다.
라고 표현한 것이다.
영화의 초입 부터 얼척이 없다.
“옛날에 전쟁이 있었다”
라는 대사가 나온다.
유독 이 영화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본 전체가 2차 대전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다.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 이라는
사실은 외면하고
“그 해에 참 더웠지”
처럼 무슨 자연 현상이 있었던 것 처럼
“있었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극 중 여자 주인공의
표현도 매우 역겹다.
비행기에 미친
남편 수발을 못하고,
폐병이 걸린것도 죄송한데
이제 죽을 판이 되자
자기가 죽는 “더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사악~남편 곁을 떠나
혼자 죽음을 맞이 한다는
내용이 그야말로 역겹다.
(그것을 고결한 행위로 연출함)
이 짤이 재밌다고 돌아 다니는데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만드는
제로센.이라는 저 비행기는
카미카제라는 이름으로
조종석을 용접하고
편도 기름만 채운 후,
미군 전함에 쳐박아 자폭하는
자살특공 비행기이다.
그 조종석에 강제로 태워진
사람중에는 우리 선조들도 있었다.
이런 비행기를 만든 인물을
찬양하는 영화가 이
“바람이 분다”이다
이때 즈음 부터 나는 일본 중년 이상 작가들에게
모든 기대를 놓아 버렸다.
정확한 시기를 기억하진
못하겠지만 에반게리온의 캐릭터 디자이너
“사다모토 요시유키”도
소위 빤스를 내려서 현재는
업계에서 소식이 안들린다.
위안부 얘기가 헛소리라며
남성 성기로 탕을 끓여 먹으라는
미친 소리를 트위터에 내갈겼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일본어로 반박하는 한국인에게
따로 대들기도 했었었다.
(이 사건 이후,
에바의 팬이던 연예인
데프콘이 에바를 더 이상
소비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기도 함)
사다모토 요시유키 역시 고딩시절
부터 정말 좋아 했던 사람이였다.
그럼에도
나는 지브리 작품이 나올때마다
NHK다큐는 챙겨 봐왔다.
이 다큐들 중
아주 큰 명작으로 생각 하는 것이
“꿈과 광기의 왕국”이다.
이것이 바람이 분다.의
제작 과정을 다룬 다큐인데
할배 이외에 스즈키 PD나
타카하타 이사오의 모습도
다른 다큐에 비해서는 더 나온다.
이 작품은 한 지브리 여성 스텝의
나레이션으로 진행 되는데
마지막 부분에 이 여성이
임신 사실을 알리고
할배는 그녀의 바로 옆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축하를 한다.
할배는 이렇게 임산부
앞에서 흡연 따윈 아무 의식도
못할만큼 안하무인이지만
또 어느 다큐에서 보면
자기는 수면제를 안 먹으면
잠들 수 없는 사람.이라며
나름 또 괴롭다는 것도 표현한다.
이미 바람이 분다.에서
오만정이 다 떨어졌지만
또 한번 홀딱 깨는 일이 있었는데
이 영상은 캡쳐 짤로도 꽤 돌아다니는 듯
하다.
어느 3D애니메이션 감독이
지브리에 찾아오고 할배도 미팅룸에 들어간다.
미리 약속된 시연이라
3D감독이 준비한 영상을 화면에
재생 시킨다.좀비 비슷한 캐릭터가
벌레 처럼 기어가는 영상이였다.
이걸 보고 할배가
꽤나 화를 낸다.
“내 지인중에 저렇게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있다.저걸 보니 그 사람 생각이 나서 괴롭다.
이런건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시연한 감독은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가 되서
그런게 아니라며 변명 하지만
할배는”이 영상에는 인간의 마음이 없다”며
나가 버린다.
감독이 이 자리에 그 영상을 가지고 온
이유는 움직임을 3D로 어느정도 표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데 할배 지 개인의 경험을 들먹이며
화 내고 나가 버린다는게
있을 수 있는 일이며 사람 대 사람으로서 할 짓인가?
날이 갈수록 비호감 게이지를
쌓아 올리다 이 영상을 보고는
게이지 자체가 터져 버려
이제는 더 이상 이 할배의 뭐든
안보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2023년
“그대들은 어떻게 살것인가?”
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는 뉴스를
봤고,앞서 말한
SBS의 스즈키 토시오 인터뷰 외에
여러 인터뷰 영상들을 보게 되었다.
요약해보면
이 영화는 주인공이 할배이며
큰아버지로 나오는 스승 같은 존재가
타카하타 이사오.
왜가리가 스즈키 토시오.
즉,지브리 스튜디오를 반추하는
영화다.라는 것이였다.
이건 참을 수 없었다.
국딩때 부터 내 인생
전반을 함께 했던 할배의 인생을
정리 한것 같은 영화라니.
그래서 봤다.
본 것이 잘못이였다.
영화는 할배 정신이 온전한지
의문이 들 정도로 지맘대로였고
영화라고 할 수준 자체가 못 되었으며
그 정도에서 그쳤으면 됐는데..
바람이 분다.에서 빤스만 내렸던 수준이라면
이젠 할배의 배설물 까지 보여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극중 주인공이 여러 캐릭터들을 만나는데
아주 노골적인 식민지배의 은유도 아니고
직유가 나온다.
조그만 씨앗 같은 생명들을 펠리컨이
다 먹어 치운다.
영화가 진행 되며 여러 캐릭터들이 나오지만
거의 관여를 하지 않던 주인공이
펠리컨만 유독 땅을 파고
묻어주며 예를 다 한다.
왜가리가 그럴 시간 없다고 타박하는데도.
그런데 그 펠리컨은 죽기 직전에 이렇게 말한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식민지배를 한 나도
어쩔 수 없었다.는 대사를 분명히 하고
주인공은 다른 캐릭터들과 달리
그 캐릭터에게만 예를 다 한다.
내 생각에 할배의 다음 작품은
전범기의 아름다움을 다루는
작품 정도지 않을까 싶다.
당시 이 작품에 대한 대중
평가는 좋지 못했다.
그렇지만 다들 이런식이였다
“보다 졸았다.그렇지만 역시 지브리 감성 하나만은 죽였다”
“지루 했지만 크~역시 지브리의 그 색감,분위기는 추천”
이래서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찬양한다는
소리가 나오는 듯 하다.
지브리 초기 부터 색채를 지정하던
색채 감독 할매는 몇년전 사망하여
이 작품에 참여 하지 못했다.
진격의 거인 작가는
한국의 근대화를 일본이
했다는 글을 트위터에
썼었고,
귀멸의 칼날은
주인공의 전범기 문양
귀걸이를 중국과 한국 수출용에서만
다른 모양으로 수정하고
자국과 다른 국가 수출용에선
그대로 내보내며 현재도 수익을 올리고 있다.
차라리 이런 태도가 할배 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안그런척 하다
통수 치는 할배 보다는..
할배의 다음 작품이
내 예상과는 다르길 빌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