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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스 Apr 19. 2024

Epilogue

양육자에서 보호자로 거듭나기

 바야흐로 5년 전, 첫째가 다섯 살 무렵 셋째가 태어나면서 '육아'라는 노동의 강도에 정점을 찍었다. 높을 대로 높이 치솟은 그래프는 내려올 줄 모르고 그렇게 2년 동안 상한가에 머물렀다. 셋째가 두 돌 무렵이 되자 극한에서 직선을 이루던 그래프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미끄럼틀처럼 내려왔다.


 6살, 8살 그리고 10살, 세 아이의 육아는 제법 할만하고 드디어 살맛 난다. 유모차를 졸업하니 아이들과 어디를 가도 양손이 가볍다. 가벼워진 양손에 작고 따뜻한 손 여섯 개를 번갈아 잡고 거닌다. 두 시간마다 소변 체크를 하며 기저귀를 갈아주던 업무에서 해방된 지 오래, 아이들은 스스로 볼일을 보고 온다. 재워줘야만 자던 아이들은 이제 시간만 되면 스르륵 잠이 들고, 제알아서 일어난다.


 육아 10년 차, 감히 육아의 황금기라 칭해본다. 더 창창하고 눈부신 앞 날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갈수록 수월하고 편해지는 나날이라 지나온 육아 시절을 그리며 울고 웃는다. 어쩌면 다가올 육아는 어두운 잿빛일 수도 있겠다. 학업, 사춘기, 친구 문제, 입시 등의 묵직한 과제들이 곧 다가오리라. 부모로서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내가 직접 걸어봤던 길 아니던가. 앞으로의 과제들은 엄마로서 노동의 가치는 대수롭지 않다. 아이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과제, 나는 그야말로 보호자일 뿐이다. 아이가 직면한 것들을 잘 헤쳐나가기 위해서 내가 할 일은 지금보다 더 뒤로 물러나는 일일 것이다.


 먼저 걸어본 자들에 의하면 자녀의 사춘기는 지난 여정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면 갈수록 육아는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단언한다. 아무렴 나의 배변 욕구를 거스르며 화장실도 못 가게 우는 날은 앞으로 없을 것이다. 꼭두새벽에 쉬 했다고 울면서 나의 수면을 방해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전반부의 육아는 몸이 힘들고 후반부의 육아는 정신이 힘들다고 수두룩한 힘듦을 나열하며 야단법석이다.


 아이들은 영롱하며 순순한 동심으로 가득 차있다. 믿는 만큼 아이들은 건강하고 밝게 자랐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산달을 앞두고 내가 출산의 고통을 아무리 상상한다고 해도 그 고통의 무게를 느낄 수 없었던 것처럼. 오지 않은 미래를 아무리 그려봐도 내 아이의 사춘기는 어떤 색인지 가늠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출산은 고통을 뛰어넘는 황홀함이었다. 통잠을 잘 자는 분유가 최고라고 했지만 모유는 외출 준비물이 없어서 간편했고, 탯줄에서 분리된 아기와 다시 만나는 짜릿한 교감이었다. 언제나 선배들의 이야기와 현장 육아는 온도차가 극심했다.


 나는 자신 있다. 앞으로 직면할 과제들 또한 건강하고 밝은 아이들은 무탈히 지나갈 것이라고, 나는 부모로서 먼발치에서 지켜보리라고. 학창 시절 크고 작은 문제들은 유년 시절 부모와 나눴던 사랑의 깊이와 비례할 수도 있다는 검증되지 않은 오만한 상상도 해본다.


 6살, 8살, 10살 세 아이들의 눈에는 아직도 엄마가 가득하다. 엄마가 읽어주는 그림책을 들으며 하루를 정리하고 엄마의 살냄새를 맡으며 안정감을 찾는 아이들은 아직도 엄마인 내가 세상의 전부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몸이 힘들어 그 값진 사랑을 고스란히 받지 못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과분한 사랑으로 엄마에게 다가온다. 이제야 아이들과 진실된 사랑을 나누며 일상의 행복을 누린다. 이 시간이 유한할 것을 알기에 더욱 값지고 귀한 것이다. 엄마를 눈에 가득 담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말소리, 두 팔 벌려 포옥 안아주던 온기, 종이 조각에 적은 동심 가득한 편지, 따뜻한 집밥과 함께 재잘거리던 아이들의 음성 모두 목이 메일 정도로 소중하고 그리울 것이다.


 다가올 미래에는 아이들과 거리두기. 앞으로의 나의 과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빠져야 한다. 아이들은 엄마와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을 조금씩 친구에게 내어줄 것이다. 엄마는 뒷전이고 친구가 전부인 그런 날이 다가오리라. 나도 그랬고, 남편도 그랬고 다수가 그런 학창 시절을 보내지 않았는가. 아이가 내 품을 떠난 시간에 공허함이 밀려들지 않도록 아이가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 넣어야 한다. 독서, 글쓰기, 부업 그 어떤 것이라도 좋다.


 나밖에 모르던 내가 엄마가 되면서 내 삶의 '나'라는 존재를 잊어갔다. 육아는 나를 지우고 비워낼수록 엄마라는 이름에 더욱 가까워졌다. 육아 10년 차, 내 삶에 '나'는 증발되고 완연한 엄마만 남았다. 그간 잊고 지냈던 나를 천천히 찾고 채워본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삶처럼 설레고 신명 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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