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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나나 (Part 2)

by 윤현섭

빠나나? 유미는 언젠가 유아원에서 배운 노래 가사를 떠올렸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빠나나 빠나나는 길어라는 가사였다. 그때 유미는 노래에 나오는 빠나나가 뭔지 몰라 옆에 앉은 중호에게 그게 뭐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중호는 턱을 잔뜩 쳐들고 젠체하며 말했다. “야! 넌 빠나나도 모르냐? 난 저번에 우리 아빠가 사 와서 먹어봤지. 메롱. 빠나나는 다른 과일처럼 씹는 게 아니라 입에 넣고 살살 돌려가며 녹여 먹는 거야. 알겠어?” 자신을 약 올리는 중호를 보며 유미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언젠가 척척박사 아빠가 꼭 사주실 거라며 자신을 위로했다.

“할미 나 배고파. 빠나나 사줘. 응?” 유미는 할머니 쪽으로 몸을 돌려 조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괜한 얘기를 꺼낸 아줌마가 얄미웠지만, 유미가 한 번도 빠나나를 먹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녀에게 한 번쯤 꼭 빠나나를 먹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빠나나 한 개에 얼마요?” 할머니는 주머니 속에 있는 지폐를 만지며 물었다. “어르신! 원래 한 개에 이천 원인데 특별히 백 원 빼 드릴게요.” 할머니는 그 돈이면 짜장면을 두 그릇이나 먹을 수 있는데,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미에게 빠나나를 사주고 나면 택시비가 부족할 것 같았다. 택시비가 부족하면 결국 동생한테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할머니는 유미를 달래기 시작했다. 당신이 없어 보이면 착한 아들의 면이 서질 않으니까. “유미야. 우리 빠나나 말고 귤 먹을까?”

귤은 이미 많이 먹어봤고, 중호한테 놀림당한 기억까지 떠올라 유미는 막무가내로 떼를 쓰기 시작했다. “싫어 싫어. 난 빠나나 먹을 거야. 빠나나 먹을 때까지 절대 안 갈 거야.” 할머니의 난감한 표정을 보며 아줌마가 말했다. “어르신 제가 백 원 더 빼 드릴 테니까 그냥 빠나나 사주시죠.”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할머니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도 덜덜 떨리는 무릎이 너무 아파 택시를 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버스를 타도 앉기만 하면 괜찮다고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아줌마에게 건넸다.

아줌마는 할머니에게 잔돈을 거슬러 준 다음 빠나나 한 개를 유미의 손에 쥐어줬다. 빠나나를 받아 든 유미는 어찌나 신기한지 이리저리 돌려보며 냄새를 맡았다. 노란 껍질 안쪽에서 달콤하고 푸르스름한 향기가 뒤섞여 흘러나왔다. “아줌마 빠나나 어떻게 먹는 거예요?” 한참을 이리저리 만져본 끝에 유미가 아줌마에게 물었다. “일단 한쪽 손으로 바나나를 잡고 위에서 아래로 껍질을 벗기는 거야. 결대로 쭉쭉 벗겨지니까 어렵지 않아.” 아줌마의 말을 듣고 유미는 빠나나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미의 손놀림은 서툴렀다. “유미야. 할미가 껍질 까서 줄게. 이리 다오.” 빠나나를 건네받은 할머니는 천천히 껍질을 벗겼다. 조금씩 껍질이 벗겨질 때마다 풍기는 달콤한 향 때문에 유미는 점점 더 그 맛이 궁금해졌다. 이윽고 껍질을 다 벗긴 할머니는 유미에게 빠나나를 건네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갑자기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껍질 밑동을 잡고 있던 할머니의 뻣뻣한 손가락이 스르르 풀리자 빠나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에구머니나! 이를 어째!” 깜짝 놀란 아줌마가 빠나나를 잡으려고 손을 뻗어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움직이는 관성을 못 이겨 떨어진 빠나나를 밟아 으깨 놓았다. “으앙! 내 빠나나!” 유미는 울음을 터트렸다. 빠나나를 못 먹게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다음에 중호를 만나면 우쭐대려던 계획까지 모두 틀어져 버려 너무 서러웠다. 한동안 서럽게 우는 유미를 지켜보던 아줌마가 난감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르신. 제가 너무 죄송해서 그런데 한 개 더 사시죠. 천오백 원에 드릴게요. 제가 도매시장에서 한 개에 천오백 원 주고 떼어오니까 사실 이문 없이 드리는 거예요.” 할머니는 울고 있는 유미를 위해 말없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아줌마에게 건넸다. 할머니는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껍질을 까서 유미에게 주었고, 빠나나를 받아 든 유미는 입속에 넣고 돌려가며 쪽쪽 빨아먹기 시작했다. 포도알 같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면서 할머니는 유미에게 물었다. “유미야. 빠나나가 그렇게 맛있던?” “응 할미. 지금까지 먹어 본 것 중에 최고야!” 할머니는 아직도 유미의 입가에 묻어있는 빠나나의 흔적을 뻣뻣한 손으로 쓱 닦아주었다. “할미! 근데 아까 할미도 하나 사 먹지 그랬어?” 순진한 유미의 질문에 할머니는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아가며 빠나나를 먹으면 속이 니글거려서 싫다고 말했다. 가게까지 왔던 길을 반대로 10분 정도 걷자 택시 승차장이 보였다. 할머니는 유미의 손을 잡고 그대로 지나쳐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가게를 나올 때만 해도 약했던 눈발이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 쌓인 길을 걸을수록 할머니와 유미의 신발은 점점 축축하게 변해갔다.

정류장에 도착해 보니, 꽤 많은 사람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맞으며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마치 바다로 나간 어미를 기다리는 새끼 펭귄처럼 보였다. 할머니는 외투를 풀어 유미를 품에 안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는 버스가 보였다. 마침내 버스가 정차하자 할머니는 유미를 안고 서둘러 올랐다. 다리가 너무 아파 꼭 앉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기사 바로 뒷자리가 한 개 남아 있었다. 유미가 무릎에 앉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다리가 욱신거렸다. “기사 양반. 이 버스 서빙고동 쪽으로 가는 거 맞지?” 잠시 숨을 고른 할머니가 버스 기사에게 물었다. “아이고! 어르신. 반대편에서 타셨어야 했는데. 쯧쯧 이를 어쩌죠?” 당황한 할머니가 지금 좀 세워달라고 부탁하자 버스 기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고객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회사 방침에 따라 어쩔 수 없다며 다음 정류장까지 그대로 차를 몰았다. 다음 정류장에 도착하자 버스 기사는 마치 대단한 배려나 하는 듯이 할머니에게 앞문으로 내리셔도 괜찮다고 말했다.

버스에서 내린 할머니는 춥다고 칭얼거리는 유미의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리고 신호등 바로 옆에 있는 정류장에서 유미를 품에 안고 버스를 기다렸다. 다시 흐르기 시작한 유미의 누런 콧물이 모두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늙으면 빨리 죽어야지 살아서 뭐 해’ 할머니 어깨에 눈이 소복이 쌓일 때쯤 서빙고행 버스가 도착했고, 할머니는 유미를 안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난폭하게 출발하는 바람에 할머니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요금통을 꽉 잡고 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잠시 후 주머니에서 뺀 손바닥에는 십 원짜리 동전 몇 개만이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다. 당황한 할머니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다. ‘아까 반대쪽에서 버스를 타면서 주머니를 뒤지다가 흘렸을까?’ 처음 버스를 탈 때, 앉기 위해 서둘러 계단을 올랐던 자신의 뒤쪽으로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했다. 할머니는 너무 막막한 나머지 다리에 힘이 쭉 풀려버렸다. “할머니! 빨리 요금 내셔야죠.” 무뚝뚝한 버스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사 양반. 미안한데 내가 돈을 잃어버린 것 같아. 좀 봐줄 수 없겠나?” 할머니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무릎 통증이 너무 심해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니 할머니! 돈이 없으면 타질 말아야지. 타고서 어떻게 되겠지 하면 뭐가 해결돼요?” 버스 기사는 큰소리로 할머니를 윽박질렀다. “가뜩이나 눈 많이 와서 짜증 나는데, 오늘 되는 일이 없구먼. 빨리 내리세요. 어서! 꼬마 너도 같이!” 버스 기사는 할머니와 유미를 도롯가에 버리고 그대로 출발해 버렸다. 고객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회사 방침 따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거리는 온통 하얀색이었다. 할머니와 유미가 내린 도로는 평소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아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할머니는 유미의 손을 잡고 버스가 지나간 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미 신발은 다 젖어서 발가락의 감각이 거의 없었다. 여기서 동생이 사는 집까지 얼마나 걸릴지 또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지 할머니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걷는 것 말고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대로 더 지체했다간 유미마저 동상에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리를 절면서 절뚝절뚝 걸을 때마다 주머니 속에 있는 동전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달그락달그락.

어제부터 내린 눈 때문에 길 곳곳에 빙판이 똬리 튼 뱀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행여나 미끄러질까 온 신경을 발밑에 집중하며 걸었다. 한참 동안을 그렇게 걷다 보니 멀지 않은 곳에 공중전화가 보였다. 할머니는 칭얼거리는 유미를 달래 가며 겨우겨우 공중전화 안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공중전화 안에 있으니 온몸으로 바람을 맞을 때보다 훨씬 따뜻하게 느껴졌다. 잠시 숨을 돌린 할머니는 동전을 꺼내 투입구에 집어넣었다. ‘전화번호가 몇 번이더라?’ 할머니는 요즘 부쩍 깜빡깜빡하는 일이 많았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동생과 통화했다. 그런데도 동생 전화번호가 정확히 생각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일단 떠오르는 대로 번호를 눌러보았다. 뚜뚜거리는 단조로운 신호음만 계속될 뿐 연결되는 전화는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집으로 건 전화 역시 신호만 이어질 뿐 누구 하나 받는 사람이 없었다. 망연자실한 채 가만히 있는데 유미가 할머니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며 칭얼거렸다. “할미! 나 발가락이 따끔따끔해. 쉬하고 싶어. 아까부터 참았단 말이야.” 계속 급하다고 조르는 손녀의 말에 다급해진 할머니는 마침 앞에 보이는 노점상으로 걸어가 변소가 어디냐고 물었다. 손님인가 싶어 싹싹하게 인사하던 주인은 할머니의 질문에 퉁명스럽게 답했다. “아니 어르신! 팔아주시지도 않고 변소만 쓰시게요?” 노점상 주인은 변소부터 먼저 다녀와서 뭐라도 먹겠다는 할머니의 말을 듣고 나서야 위치를 알려주었다. 얼마 후 변소에서 돌아온 할머니는 제일 싼 꼬치 어묵을 유미 손에 쥐어주고, 주머니에 남은 동전을 탈탈 털어 노점상 주인에게 건넸다. 주인은 겨우 그것뿐이냐는 눈빛으로 동전을 받았고, 평소 같으면 공짜라고 했을 어묵 국물도 딱 한 컵만 퍼서 할머니에게 주었다. “할미! 국물에서 꽃게 맛이 나.” 호호 불며 어묵 국물을 맛본 유미가 신기한 듯 말했다. “많이 뜨거우니까 혀 데지 않게 조심해서 먹자꾸나.” 할머니는 맛있게 먹는 유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정작 본인은 한 모금도 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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