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빙고동 방향으로 얼마나 걸었을까? 아까부터 오르막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한강 너머에서 불어온 바람은 언덕을 타고 사정없이 내려왔다. 유미는 춥고 무서웠다. 젖은 신발 속 차가운 발가락은 벌에 쏘인 듯이 따끔거렸다. “할미! 나 발이 너무 아파서 못 걷겠어. 업어주라. 응?” 새빨갛게 얼어붙은 얼굴로 조르는 유미를 보면서 할머니는 다시 한번 자신을 원망했다. 그리고 말없이 손녀 앞에 겨우 쪼그려 앉았다. “할미가 어부바해 줄게. 조금만 더 참자. 다 왔다.” 추위에 떨며 돌아다녀서 피곤했는지 유미는 업히자마자 졸기 시작했다. "유미야 저기 하늘에 별 봐라 별." 할머니는 유미를 불러가며 깨워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완전히 잠들어 축 처진 유미는 견딜 수 없이 무거웠다. 이대로는 몇 발자국도 갈 수가 없었다. 까딱하면 넘어질 것 같아서 할머니는 길가에 아무렇게나 놓인 나무 박스 위에 무너지듯 걸터앉았다. 앉으면서 짚은 손가락 사이로 가느다란 고드름이 만져졌다. 그러나 이미 손가락이 마비된 탓인지 고드름은 차갑지 않고, 단지 딱딱하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무릎에 겨우 유미를 눕히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은 영원히 멈출 것 같지 않았고, 둥그런 보름달은 여전히 환하게 걸려있었다. 할머니는 문득 30년 전 먼저 가버린 남편을 떠올렸다.
남편은 다정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항상 바쁘게 일하느라 제 몸 하나 챙길 줄도 몰랐다. 남편과 같이 산 짧은 세월 동안 3남 1녀를 얻었고, 항상 빠듯했지만 행복했다. 이렇게 둘이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 사글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겨울에 태어난 남편은 유난히 겨울을 좋아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시장에 간 남편은 팥죽을 한 그릇 사 왔다. 할머니가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창 먹는데 옆에 있던 남편이 말했다. “여보. 난 코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한겨울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어. 항상 이맘때 날카로운 추위가 조금 무뎌진 느낌이 들면 이상하게 슬퍼지거든. 마치 스치듯 짧은 시간이 흘러 땅에 떨어진 목련을 보는 기분이야. 인간은 정점에서 행복을 느끼는 동시에 곧 닥쳐올 내리막 때문에 불행한 존재 같아. 난 겨울이 스러지는 때에 삶이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때 먹고 있는 팥죽 속에서 열심히 새알을 찾던 할머니에게 남편의 말은 잘 와닿지 않았다. 다음 해 겨울이 스러질 무렵 폐병에 걸린 남편은 할머니를 두고 떠나버렸다. 네 명의 아이들만 남긴 채. 할머니는 악착같이 살았다. 새벽부터 시장에 나가 물건을 팔았고, 어쩌나 한 번 쉬는 날에도 삯바느질 같은 일을 도맡아 했다. 아빠 없이 남은 아이들에게 본인보다 더 나은 삶을 안겨 주고 싶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자신을 몰아붙이면서도 할머니는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감정 따위는 사치라며 가슴속에 묻고 지내 온 날들이 떠올라 할머니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훗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남편을 다시 만나면 혼자 죽을힘을 다했으니까 따뜻하게 안아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빵빵거리는 자동차 소리에 놀라 할머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니, 트럭 한 대가 비상 깜빡이를 켠 채 서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건장한 남자가 차에서 내려 다가왔다. “아니 어르신! 추운데 여기서 뭐 하세요? 어디 가는 중이시면 어서 타세요.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할머니는 눈물이 말라붙은 얼굴을 훔치고 일어서려 했지만, 아직 무릎 위에서 자고 있는 유미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어르신! 아이는 제가 안을 테니까 천천히 일어나 보세요.” 남자의 도움으로 할머니는 겨우 차에 탈 수 있었다. “어르신!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어디로 가는 중이세요?” 할머니는 동생이 사는 집의 주소가 적힌 쪽지를 품에서 꺼내 말없이 건넸다. 출발하는 트럭 창문 너머로 찹쌀떡과 메밀묵을 외치는 장사꾼의 목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잠에서 깬 유미는 환한 형광등 불빛에 눈을 찡그렸다. 분명 할머니가 업어줬는데, 혼자 누워있는 여기가 어딘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소파에서 일어난 유미는 말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이고! 일어났구나? 엊그제 본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컸네! 추운데 오느라 고생 많았지?” 할머니 옆에 앉아 있는 다른 할머니가 웃으며 유미를 반겼다. 유미는 ‘아 저 하얀 할머니가 이모할머니구나’라고 생각하며, 최대한 공손하게 배꼽 인사를 했다. “금방 저녁 차려 줄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렴. 그동안 배고프니까 이거 먹고 있을래?” 이모할머니가 내민 쟁반에는 빠나나가 수북이 올려져 있었다. 순간 유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까 본 빠나나는 분명 하나씩 떨어져 있었는데 이 빠나나는 끝이 서로 붙어 있었다. 잠시 얼떨떨했지만, 곧 유미는 빠나나 껍질을 벗기고 맛있게 빨아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언니! 왜 이렇게 늦었어? 난 또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잖아. 우린 기다리다가 너무 배고파서 먼저 저녁 먹었으니까 언니는 유미랑 같이 먹어. 그리고 윤진이랑 하서방은 요 앞에 잠깐 갔다 온다고 나갔으니까 곧 올 거야.” 착한 아들의 체면이 깎일까 봐 할머니는 동생의 질문을 그냥 얼버무리고 말았다.
사실 할머니에게 오늘 저녁 약속은 조카사위를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할머니의 조카는 서울의 유명한 사립대학교 법학과를 차석으로 졸업 후 대형 법률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수재였다. 젊은 시절 아들 또래의 조카가 항상 아들보다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 할머니는 자랑스러움과 질투가 뒤섞인 묘한 감정을 느꼈다. 세월이 흘러 유미가 태어나고 가족들이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너무 바빠서 결혼은 꿈도 못 꾼다"는 조카의 말에 할머니는 조금이나마 위안을 느꼈다. 그래 아무리 좋아 보이는 사람이라도 결핍은 있게 마련이지라며. 그러나 조카는 얼마 전 그 결핍마저 보란 듯 해소해 버렸다. 동생의 말에 따르면 조카는 몇 개월 전부터 머리가 아파서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만난 원장이랑 가까워져 조만간 결혼할 예정이라고 했다. 동생 입장에서 보면, 하나밖에 없는 언니한테 처음으로 사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리였는데, 늦게 오고 말았으니 면목이 없었다.
너무 긴 시간 동안 추운 곳에서 기력을 소진한 탓인지 동생이 차려 준 저녁을 먹는데 할머니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가락이 잘 굽혀지지 않아 반찬을 집을 수 없었고, 떨리는 손 때문에 숟가락으로 간신히 뜬 국물이 식탁으로 떨어졌다. “언니! 어디 아픈 거 아냐?” 동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지만, 할머니는 희미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겨우 식사를 마친 할머니가 소파에 앉자, 설거지를 끝낸 동생이 빠나나 한 송이를 쟁반에 담아왔다. “언니! 기억나? 우리 어렸을 때 양키들 쫓아다니면서 기브 미 쪼꼬렛! 기브 미 캔디! 그랬던 거 말이야. 언젠가 지붕 없는 찌프차를 타고 지나가던 까만 양키가 우리 쪽으로 과자 한 봉지를 던져줬잖아. 봉지를 뜯어보니 납작하고 단단하게 생긴 노란색 과자였는데, 입에 넣으니까 너무 달콤해서 황홀할 지경이었지. 언니도 나도 양키 말을 할 줄 몰라서 그게 무슨 과자인지 너무 궁금해했잖아. 다 먹은 후에도 둘이 며칠 동안 봉지 냄새를 맡으며 킁킁거렸던 기억이 나네. 나중에 누군가 봉지에 적힌 글자를 보고 더운 나라에서 나는 빠나나라는 과일 맛이라고 알려줬잖아. 그때 난 다짐했어. 언젠가 형편이 좋아지면 꼭 언니랑 같이 빠나나라는 놈을 물리도록 먹겠다고 말이야.” 할머니가 받아 든 쟁반에는 동생의 따뜻한 마음이 가득 담겨있었다.
“엄마! 나 왔어. 아 정말 추워 죽겠네.” 현관 쪽에서 윤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모랑 유미도 와있었네! 이게 얼마만이야!" 할머니는 조카와 같이 뚜벅뚜벅 걸어오는 하서방을 보았다. 아까부터 심한 오한과 함께 얼굴이 창백해지고 있었지만, 첫 만남이라 일어서서 제대로 인사하고 싶었다. 할머니는 왼쪽 무릎에 손을 대고 천천히 일어섰다. 하지만 그 순간 핑 도는 느낌과 함께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입술이 새파랗고 각막 반사까지 소실된 거 보니까 중증 저체온증인 것 같아! 윤진아 빨리 구급차 불러!” 할머니를 살펴 본 하서방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렇게 한참을 무슨 말이 오고 갔으나 할머니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바닥에 얼굴을 댄 채 다급하게 뛰어다니는 식구들을 보면서 할머니는 그저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유미는 너무 어려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몰랐다. 그저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손 옆에 떨어진 반쯤 먹다 남은 빠나나를 주워 먹고 싶었다.
“할미! 왜 울어?” 유미가 정신을 차려보니 혜윤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쳐다보고 있었다. “할미! 울지 마! 내가 바나나 다 먹어서 그렇지? 이따 엄마한테 많이 사 오라고 할 테니까 울지 마! 응?” 유미는 자기를 걱정해주는 착한 혜윤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눈가를 훔치고 다가가 꼭 안아 주었다. 혜윤이를 안을 때면 마치 솜사탕이나 구름을 품에 안는 것 같았다. 분유 냄새가 날 나이는 진작에 지나가 버렸지만, 여전히 혜윤이의 품에서는 달콤하고 풋풋한 향기가 났다. 유미는 딸을 키우며 언제 이렇게 애틋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잘해준 것보다 아쉬운 일이 더 많이 떠올랐다. 딸이 자신보다 더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 너무 몰아붙이지는 않았나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품에 안고 있는 혜윤이 만큼은 아무런 조건 없이, 후회 없이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다.
“할미! 오늘 어린이집에서 배운 건데 바나나가 영어로 뭔지 알아?” 자신의 할머니가 30년 넘게 중학교 영어 교사로 재직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혜윤이가 얼굴을 빼꼼 쳐들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할미는 잘 모르겠는데. 바나나가 영어로 뭘까?” 유미는 정말 궁금하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미는 그것도 몰라? 브브브 버내너야.” 혀를 잔뜩 꼬아 가며 발음하는 혜윤이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유미는 손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오늘 혜윤이 덕분에 새로운 걸 알았네! 그런 의미에서 이 할미가 버내너 하나 더 갖다 줘야겠다.” 그 순간 유미는 자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혜윤이의 모습이 그리운 할머니와 많이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