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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나나 (Part 1)

by 윤현섭

유미는 바나나를 맛있게 먹고 있는 혜윤이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4년 전 겨울 이맘때 태어난 손녀는 유난히 먹성이 좋았다. 혜윤이는 특히 과일을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바나나를 가장 좋아했다. 혜윤이가 집에 놀러 올 때마다 찾는 통에 유미는 항상 바나나를 떨어지지 않게 준비해 두곤 한다. 어린이집에서 오자마자 앉은자리에서 급하게 한 개를 해치우고, 더 달라며 조르는 손녀의 모습을 보자 유미는 얼마 전 들었던 딸의 잔소리가 떠올랐다.

“엄마! 혜윤이한테 바나나 많이 주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요즘 혜윤이가 아침마다 어린이집 가기 싫다고 징징대서 얼마나 짜증 나는데. 친구들이 혜윤이 배가 올챙이 같다고 놀린다잖아. 나도 요즘 회사에 일이 많아서 아침마다 스트레스받으면서 출근하는데, 쟤까지 힘들게 하니까 정말 돌겠어.”

‘정말 바나나를 많이 먹어서 그런가?’ 밝은 오렌지색 스웨터 밑으로 앙증맞은 혜윤이의 배가 볼록 나와 있다. 문득 손녀가 춥겠다는 생각이 들어 유미는 혜윤이를 일으켜 세우고 내복을 정리해서 바지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리고 혜윤이의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슬쩍 만져본 배가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서 그리 많이 나온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미는 ‘지가 빨래를 잘 못 해서 스웨터가 줄어든 걸 가지고 왜 애먼 혜윤이 탓을 하나?’라고 생각하며 베란다에 가서 잘 익은 바나나를 한 개 더 가져왔다.

“혜윤아. 그렇게 맛있니?” 바나나를 건네며 유미가 물었다. “응! 혜윤이는 이 세상에서 바나나가 제일 좋아. 난 밥 안 먹어도 좋으니까 바나나만 먹고살았으면 좋겠어.” 혜윤이는 새로 받아 든 바나나의 껍질을 바로 벗기기 시작했다. 유미는 혜윤이가 고사리같이 작은 손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작업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조바심 내며 껍질을 벗기기가 무섭게 한 입 베어 물려다가 어떤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는지 혜윤이가 유미를 보며 말했다. “할미! 딱 한 입만 먹어봐. 이거 너무너무 맛있어.” 먹고 싶은 욕구를 참아가며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손녀를 보자 유미는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물론 첫 번째 바나나는 허겁지겁 먹느라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맛있어? 할미는 괜찮으니까 혜윤이가 다 먹어.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서 먹자. 알았지?” 혜윤이가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두 번째 바나나를 먹는 모습을 보자, 잊고 지내던 기억이 유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신이 손녀만큼이나 어렸을 때 겪은 아주 오래된 일이 마치 방금 전에 일어난 것처럼 선명하게.

기차를 처음 탄 유미는 너무 신기한 나머지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자동차는 고작해야 아빠, 엄마, 천이, 할미 그리고 나까지 다섯 명 밖에 탈 수 없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 번에 탈 수 있는 큰 차가 있다는 게 유미는 너무 신기했다. 역에서 잠시 정차했다 다시 달리기 시작한 기차 창문에 호~ 하고 입김을 불어서 도화지를 만든 유미는 밖에 보이는 풍경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차가 너무 빨리 지나가는 바람에 눈에 보이는 풍경은 금방 멀어졌다. “할미! 기관사 아저씨한테 좀 천천히 가라고 얘기해 주면 안 돼? 그림을 못 그리겠단 말이야.” 본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찡그린 표정을 지으며 유미가 말했다. “아이고 내 새끼 그랬어? 근데 어쩌지? 이 할미가 무릎이 아파서 일어나기가 힘든데 그냥 저기 보이는 보름달을 그리면 안 될까?” 할머니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는 환한 보름달이 단단하게 걸려있었다.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풍경과는 다르게 보름달은 기차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없어지지 않았다. 마치 같은 속도로 기차를 따라오는 것처럼 보름달은 똑같은 자리에 있었다. 신기한 달을 바라보며 유미는 언젠가 동화책에서 본 내용을 기억해 내 둥그런 보름달과 떡방아를 찧는 토끼 두 마리를 그렸다.

그림을 그릴 때는 몰랐는데 기차가 덜컹거릴수록 유미는 어지러웠다. 유미가 멀미를 느끼며 할머니 품에 기대려 하는데, 마침 도착역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우리 기차는 곧 용산역에 도착합니다. 놓고 내리는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시고, 승강장 사이에 발이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방송을 듣고 유미와 할머니는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차 문 앞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할미! 방금 기차 지붕에서 이상한 말이 나왔는데 그게 뭐야?” 할머니는 유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잘 모르겠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 순간 유미는 뭘 물어봐도 척척박사처럼 설명해 주는 아빠가 생각났다. “괜찮아 할미! 나중에 아빠한테 물어보면 되니까.”

할머니는 유미의 손을 꼭 잡고 열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동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미와 할머니는 출구 쪽 계단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위로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요즘 무릎이 말을 안 들어서 몇 개만 올라가도 주저앉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선로에서 부는 칼바람을 맞으며 사람들은 잔뜩 몸을 웅크린 채 계단을 올랐다. 할머니는 유미가 걱정되어 잠바 지퍼가 단단히 잠겼나 확인하고, 목에 두른 목도리를 다시 한번 꼼꼼히 감아주었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려는데 문득 빨개진 유미의 손이 보였다. 계속 손녀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털장갑을 끼고 있는 바람에 여태까지 유미가 맨손이라는 걸 몰랐다. “유미야. 장갑 어디 뒀니?” 잘 모르겠다고 멀뚱멀뚱 바라보는 유미를 보며, 할머니는 기차 안에 두고 내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왜 내리기 전에 자리를 잘 살피지 않았을까 후회가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미야. 너무 추우니까 할미 꺼 끼자 응?” 까슬거려서 싫다고 고집부리는 유미를 겨우 달래서 장갑을 끼우고, 할머니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유미가 겨우겨우 역사 밖으로 나오자 바로 앞쪽으로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광장은 귀가를 서두르는 저마다의 사연으로 북적거렸다. 집에 있는 가족들을 떠올리며 산 통닭을 잠바 속에 넣고 뛰어가는 아저씨. 술에 취해 딱 한 잔만 더 하자고 외치는 군인들. 싹싹 비빈 손을 귀에 대고 뛰어가는 여고생. 이렇듯 광장을 가로지르는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사방이 탁 트인 광장의 끄트머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할머니와 유미를 사정없이 훑고 지나갔다. 할머니는 손가락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행여나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손녀를 잃어버릴까 꼭 잡은 유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광장을 가로질러 걷다 보니 문득 광장 한 편에 높게 솟아있는 시계탑이 할머니 눈에 들어왔다. 끊임없이 얼굴로 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눈을 똑바로 뜨기도 힘들었지만, 침침한 눈을 잔뜩 찡그리며 겨우 바라보니 7시 10분이었다. 할머니는 서두르면 약속 시간에 많이 늦지 않게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주머니에 속에 넣어둔 지폐를 만졌다. 오천 원짜리였다. 아침에 출근하는 아들에게 오늘 저녁 유미를 데리고 용산 동생네 간다고 했더니 역에서 택시를 타라며 준 지폐였다. 할머니는 버스를 타면 된다고 뿌리쳤지만, 아들은 막무가내였다. “거참 다리도 성치 않고 심장병까지 있는 양반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이 돈 아껴서 부자 되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택시 타셔. 내가 엄마한테 이 정도도 못 해줄까 봐?” 할머니는 억지로 자신의 주머니에 지폐를 쑤셔 넣는 아들의 낡은 와이셔츠 소매 끝에서 잔뜩 일어난 보풀을 보았다. 그리고 아들은 잘 몰랐겠지만, 지폐를 꺼내자 지갑 속이 텅 비어버린 것도 똑똑히 보았다. 어쩔 수 없이 돈을 받았지만, 최근 들어 부쩍 야윈 아들의 얼굴을 보며 할머니는 마음이 아팠다. 살면서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는 속 깊은 아들이 마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출근하는 아들을 배웅하고 할머니는 가만히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얼마 전 방 안에서 소리 죽여 다투던 아들과 며느리가 얘기한 단어가 떠올랐다. 공장, 화재, 정리해고 같은 단어였다.

원래 할머니의 계획대로라면 역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해도 약속된 시간까지 넉넉하게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버스비를 제외한 나머지 돈은 아들의 지갑 속에 몰래 넣어둘 작정이었다. 하지만 수원역에서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유미가 사라져서 찾느라 시간을 허비했고, 손녀가 너무 춥다고 징징대는 통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게다가 유미와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를 때는 긴장해서 몰랐는데 지금은 걸을 때마다 양쪽 무릎이 찌릿찌릿했다. 할머니는 어쩔 수 없이 유미의 손을 잡고 택시 승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눈 오는 퇴근 시간 무렵이라 많은 사람이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줄로 선 사람들은 오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고, 할머니와 유미는 줄 맨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택시 승차장 쪽으로 연신 강한 바람이 불어오자 할머니는 단단히 여며진 외투를 풀어헤치고 유미를 품에 안았다. 추워서 빨갛게 볼이 갈라진 유미는 할머니 품으로 파고들며 잠시 바람을 피했지만, 누런 코가 줄줄 흘러내렸다. 유미의 얼굴을 본 할머니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앞에 선 남자에게 말했다. “젊은이! 미안한데 우리 손녀딸이 너무 추워해서 잠깐 몸 좀 녹이고 오려고 하는데 자리 좀 맡아줄 수 있겠나?”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마지못해 돌아봤으나, 젊은이라는 말을 오랜만에 들은 중년 남자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자기가 택시를 탄 후에 오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다시 기다리셔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할머니는 춥다고 계속 칭얼대는 유미를 데리고 택시 승차장 오른편 골목으로 돌아서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름한 건물에 매달린 작은 간판이 보였다. 하얀 바탕에 만수 상회라는 검은색 글씨가 조악하게 쓰여 있었고, 그 아래 굳게 닫힌 유리 너머로 백열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리고 안에는 어떤 뚱뚱한 아줌마가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잠깐 문 앞에서 망설이던 할머니는 뻣뻣해진 손가락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열린 문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오자 졸고 있던 아줌마는 몸을 부르르 흔들며 눈을 떴다. “아이고 깜빡 졸았네. 어르신 어서 오세요. 추운데 난로 옆으로 오셔서 몸 좀 녹이세요. 어머! 아기가 이쁘게도 생겼네. 너도 이쪽으로 와서 몸 좀 녹이렴.” 싹싹한 아줌마의 말을 들으며, 할머니와 유미는 안심하고 난로 옆으로 다가섰다. 할머니는 유미의 잠바에 묻은 눈을 손으로 탁탁 털어냈다. 잠바 위로 단단히 묶어놓은 목도리를 풀자 유미의 입김이 잔뜩 서려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여전히 유미의 코에서는 누런 콧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따뜻한 난로 앞에서 잠시 몸을 녹인 유미는 가게 안에 있는 과일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출입문 쪽으로 면한 가장 앞쪽 진열대에 잘 익은 귤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바로 다음 진열대에는 새빨간 딸기가 대야마다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일 안쪽 마지막 진열대에 놓인 노랗고 길쭉한 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놓인 다섯 개의 길고 노란 물체를 보며 유미는 저게 무엇일까 궁금했다. “어머! 넌 어쩜 이렇게 눈이 포도알처럼 생겼니? 이육사 시인의 그거 뭐였더라? 암튼.” 아줌마의 얘기를 들은 유미의 머릿속에는 2, 6, 4가 순서대로 떠올랐지만, 여전히 눈만큼은 노란 물체를 향해 있었다. “아! 너 이게 궁금했던 거로구나! 이건 빠나나라는 과일이야. 저 멀리 더운 나라에서 나는 과일인데, 맛이 아주 기가 막히단다. 할머니한테 하나 사달라고 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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