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서 도망가려면 어디로 달려야 하니?
도박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철컹'
4(死) 문 [도망]
난 대체 어디로 달려야 하니?
안내방송
이번 방은 푸른 구슬 방입니다. 정면의 구슬로 이동하세요.
획득 아이템: 푸른 기억의 파편 3+1
획득 방법: 영상이 끝난 파편을 획득하시면 됩니다. 영상은 눈의 생체반응 시간에만 재생됩니다.
*주의: 이번 방에선 뛰고 달리면 구슬파편에 찔려 다칠 수 있습니다. 호흡을 천천히 길게 가져가세요. 당신의 호흡이 짧았던 때의 기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방에서만큼은 뛰고 달리기를 못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네.
그래 난, 달리기를 못하는 것도 문제였다. 뛰지 말 때 뛰고, 뛸 때 안 뛰었다. 인생을 달리는 방법도 모른 채,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만 냅다 뛰었다. 그곳은 언제나 한 방향을 향해 있었다.
대체 난 언제까지 숨을 곳을 찾아 달리고, 도망가기 위해 달려야 하니?
정면에 제법 큰 푸른 구슬 하나가 있다. 다가가는데 갑자기 구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억'
한 발자국 갈 때마다, 수십 개의 금이 가고 있다. 가까이 갔을 땐, 이미 금이 방충막처럼 그어져 있다. 구슬에 거미줄이 쳐져있는 듯했다. 그리고 구슬에 영상이 나온다. 금이 너무 많이 가서 화면이 일그러져 보이지만 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치 내가 거미줄에 걸려있는 듯 보인다.
자훈이와 구슬치기를 하고, 내가 가진 구슬을 다 잃은 날의 일화다.
1화
다락방에서 구슬이 담겨있는 형의 보물상자를 몰래 열어 푸른 구슬 하나와 쇠구슬 하나를 꺼냈다. 방바닥에 푸른 구슬을 내려놓았다. 난 형이 아끼는 쇠구슬을 들어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방바닥이 깨질 정도로 힘껏 내리쳤다. 나의 목적은 푸른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자훈이 웃음소리를 깨버리는 거였다.
'빠지직~쾅'
정면에 있던 큰 구슬이 큰 굉음과 함께 깨지며 산산조각 났다. 바닥에 깨진 구슬 파편들이 흩어졌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조각들에 재생 표시(▶)가 나타났다.
난 가까운 것 중 개미처럼 생긴 파편 쪽으로 걸어가 바라보았다. 재생되기 시작했다.
1990년 가을 운동회 이어달리기
'탕!'
총성과 함께 열띤 응원전이 시작되었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운동회의 피날레를 장식할 계주가 시작되었다. 엎치락뒤치락 막상막하다.
양 팀의 마지막 주자들이 바통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멀리서도 그 가쁜 숨이 느껴진다. 둘은 교내 1,2위를 다투는 육상부 6학년 에이스들이다.
자훈이가 바통을 이어받는 과정에서 전 주자와 호흡이 안 맞았다. 떨어진 바통을 얼른 주워 들고 전력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벌어진 격차를 좁히는 건 역부족이었다. 경기는 끝났고, 우리 청군은 졌다.
가만히 땅만 쳐다보고 있는 그의 곁에 갔다.
"자훈아, 괜찮아? 많이 따라갔는데 아깝다. 바통만 안 떨어졌어도 이겼는데. 그래도 너 엄청 빠르더라. 거의 다 따라잡았었어. 멋지더라. 잘했어."
잠시 후, 자훈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뭘 안다고? 달리기도 못하는 네가 뭘 아는데? 척하지 마. 내가 잘 잡았으면 되는 거였어. 내가 더 빠르게 뛰었으면 됐었다고. 도중아, 그런 말 위로 전혀 안되니까. 하지 마."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외쳤다.
"으아아아!"
자훈이는 그대로 학교 교문을 빠져나갔다. 난 그대로 서서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한 게 진심 어린 걱정이었을까? 착한 척이었을까?
난 지금 들켜서 숨고 싶은 걸까? 자훈이 말에 화가 난 걸까?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이렇게 그와의 마지막 운동회가 끝났다
자훈이는 6년 동안 내가 집에서 해방되어 간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그와 놀면 내 기분은 그의 발처럼 빨라졌다. 순식간에 모든 걸 잊게 되고 좋았다.
그와 같은 학교를 다닌, 같은 동네에 살던 마지막 해였다.
이듬해 동네 재개발이 시작되었고,
그가 먼저 이사를 갔고, 나도 그 동네를 떠났다.
개미굴 같이 미로 같던 동네는 사라졌다.
6학년이 되어도 밤에 가지 못하는 화장실,
개가 나에게 짖는 듯한 소리,
날 노려보는 듯한 대문에 박힌 사자 얼굴
이제 더 이상 이것들로부터 도망치고 숨지 않아도 되었다.
난 중학생이 되었고, 형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영상이 끝났다. 난 푸른빛의 파편을 집어 들었다. 다른 쪽 제법 큰 파편 쪽으로 이동했다.
2017년 달려라 하니, 후니 그리고 달려야 하니?
오늘은 자훈이와 그 동네 추억 얘기가 하고 싶었다.
"어, 후니 왔다. 하하하. 기다리느라 술 다 깨겠다. 이리 와, 앉아. 우리 옛날 얘기하면서 밤새 마시자. 오늘 나 돈도 많이 땄어. 너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
'띠~잉'
술이 살짝 깨려는지 머리가 살짝 지끈거리고, 환청도 들리는 것 같다.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보던 자훈이가 한 마디 한다.
"도중아, 너만 보면 마음이 아려. 이제 그만해. 나 애리다."
"하하하. 그래, 맞아. 넌 나애리급이었어. 예전부터 달리기가 지리긴 했어. 6학년 운동회 때 떨어진 바통 잡을 때만 해도 그냥 졌다 생각했는데.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걸. 그런데 포기 안 하고 죽도록 뛰더니, 심지어 이름이 뭐더라? 암튼 육상부 2위 잡을 뻔했잖아. 하하하. 그러고 보니 걔가 나애리고, 네가 하니 같았네. 대단했어."
"여기서 그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야?"
"하하하. 네가 나 애리다고 하는데, 갑자기 달려라 하니가 생각났어. 달려라 하니 말고 달려라 후니. 어때? 그러고 보니 넌 인생도 참 그렇게 쉼 없이 달리는 놈이네. "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
"근데 더 잊히지 않는 건, 경기 끝나고 너였어. 그래 딱 지금 너처럼 서있었어. 기억나?"
"어, 그래. 기억나."
"대체 뭐가 눈물 보일 정도로 어린 너를 분노하게 했던 걸까? 대체 뭐 때문에 너는 이런 나를 이렇게도 구하려 하는 걸까? 생각하니 널 이해할 수 있겠어. 그런데 내가 그런 너를 받아들이기가 너무 싫어."
요즈음 들어 자훈이는 나를 걱정하며 구하려는 방향으로 운동회 때보다 더 열심히 달리고 있다.
특히 어머니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후부터 더했다. 그의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런데 난,
그가 이렇게 애쓰고 있는 게 부담스럽다.
그가 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싫다.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피해 주기 싫고,
날 안쓰럽게 쳐다보는 표정들도 보기 싫다.
난 모두에게 그렇게 도망가고 싶었다.
별거를 시작하고, 자훈이도 떠밀고 있었다.
"자훈아, 내가 네 속도와 근성을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니? 그러니 그냥 네 갈 길 달려. 그리고 이런 말 이제 안 했으면 좋겠어. 듣기 싫고, 사실 하나도 안 와닿아."
"야! 뭐라는 거야? 감상에 젖어 개소리하지 말고. 도박해서 딴 돈? 그 악취 나는 돈을 내게 들이민다고? 역겨워. 넌 어머님한테 미안하지도 않니? 그 일이 있고도 정신이 안 차려지니?"
자훈이는 내가 더 이상 들추기 싫어 꾹꾹 누르고 있던 그날을 언급했다.
"그만해. 자훈아, 내가 네 인생 속도에 달려야 하니? 난 너처럼 못 달려. 술 한 잔 하자고 불렀는데, 뭐가 맨날 이리도 복잡한데? 그냥 술 한잔 편히 짠해주는 날이 단 한 번이 없네."
'쾅! 째쨍!'
유리컵을 들고 있는 채로 테이블에 세게 내리꽂았다.
고개를 떨꾸는 동시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유리조각들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깨어진 유리 파편이 내 마음에 박혀
심장에 금이 가는 느낌이었다.
중력에 빨려 들어가듯,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눈물이 '뚝' 떨어졌다.
이 눈물 묻은 조각들을
다시 되돌리고 싶어 힘을 줘 잡았지만,
내 몸에 다시 넣을 수 없는
빨간 피만 흐를 뿐이었다.
좀 진정하고 고개를 살짝 들었다.
자훈이, 호식이, 신우, 사라가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흐릿해 보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하다.
그러다 자훈이를 바라보았다.
서로 그렇게 말없이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말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자훈이만큼 나를 바라보는 이가 있을까?
'고맙다'
'착착착'
사라가 내 뺨을 때리며 말한다.
"오빠, 정신이 좀 들어? 정신 차려! 손 줘봐."
여전히 날 바라보고 있는 자훈이에게 말했다.
"가. 지친다. 내 인생에 네가 없는 게 더 낫겠어. 이제 널 보면 예전처럼 힘도 나질 않아. 더 힘들어."
새빨간 얼굴이 터지고, 눈물도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 영상이 끝났다.
난 그날의 감정이 되살아나 호흡이 가빠졌다. 숨을 고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 두 개의 파편 조각에 흐르던 영상들을 머릿속에 옮기고 정리하며 잠시 쉬었다.
운동회가 끝났다. 집에 가는 길에 자훈이 집을 지나치다 걸음을 멈췄다.
'쨍그랑'
가방에서 푸른 구슬을 꺼내 바위에 던져 박살 냈다.
깨진 조각이 얼굴을 스치며 상처를 냈다.
유리컵이 깨지고, 푸른 구슬이 깨지듯
내 모습들이 산산조각 나듯,
파편에 스쳐 지나가는 영상들이 꺼지고
깨진 기억의 청색 빛만 남아있다.
두 번째 푸른 조각을 집어 들고 이동했다. 숫자 4처럼 보이는 파편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난 영상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와장창'
난 창문을 깨고,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야 이 개새끼야... 먹이지 말라고!"
난 그대로 120kg에 육박하는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깜짝 놀랐다.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기억이었다.
1997년 444방 사건
어쩌면 이날이 내가 달리는 방향을 처음 바꾼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