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폭력의 냄새를 어떻게 지우지?
아무것도 안 하기
"2학기는 박찬호, 선동렬 방어율 이길 수 있겠어. 이대로라면 무조건 가능해. 출석률 0.000%. 하하하."
"너 지난 학기도 0점대 아니었냐?"
"야! 쓸데없는 얘기하지 말고 수업이나 다녀와. 당구장 가있을게. 대출(대리 출석) 절대 하지 말고"
2학기 목표는 All F 다.
주변을 보면 이런 목표를 가진 얘들도 없는 것 같고,
난 공부해서 1등은 절대 못하니,
뒤에서 1등을 노리자.
이건 쉽다. 아무것도 안 하면 된다.
거짓말의 일상화
'삐~삐'
삐삐에 어머니 번호가 찍혔다. 간절히 기다렸던 연락이 왔다. 얼른 전화를 했다.
'따르릉'
"많이 늦었지? 이제야 마련했어. 확인해 봐. 밥 잘 챙겨 먹고."
"네, 알았어요. 별일 없으니 걱정 마세요. 이번 주는 과제 때문에 못 가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시고요. 끊을게요."
'딸깍.'
10만 원이 입금되었다. 일주일 전에 부탁한 돈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와서 다행이다.
난 거짓말을 해서 돈을 챙겼다.
복합적 감정
드디어 내기당구를 치기로 했다. 돈을 못 구해서 미루고 미루던 경기이다.
당구만큼은 그 누구한테도 안 질 자신이 있다.
게임을 시작했다. 이 선배형과 처음 치는 거였다. 몇 큐 치는 걸 보니 확신이 들었다. 판 돈(5만 원 내기 돈)은 무조건 '내가 먹었다'였다. 형의 실력으로는 나를 이길 수 없다.
역시나 생각보다 쉽게 이겼다. 겸손한 척하며 치느라 상당히 불편했다.
"도중이, 이 새끼 운 겁나 좋네. 너 뽀록구(운에 의한 예기치 않은 득점)만 아니었어도 진 거 알지? 야, 받아. 여기 5만 원."
그의 말이 맞다. 오늘 뽀록에서 이어진 장타가 장난 아니었다. 역시 당구는 뽀록 뒤에 장타만큼 상대를 흔들리게 하는 게 없다. 하하하.
몇 게임 더 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날밤, 기숙사 95학번 형이 96, 97학번을 자기 방으로 불렀다. 기숙사 과 회식이라 표현하지만, 그냥 술 먹자는 거였다. 난 술자리라 안 갔다. 동기 방에서 게임(디아블로 1)을 하고 있었다.
트라우마
30분 후 동기 하나가 나를 찾아왔다.
"도중아, 종대형이 너 데려오래."
난 만사에 숨고 도망치기 바쁘지만,
술 냄새와 폭력은 나를 현실로 바로 끌어낸다.
안 먹는다고 직접 말하러 갔다.
다들 모여있는 방에 들어갔다.
술냄새가 진동한다.
"어이 뽀록 잘 치는 도중. 축배 한 잔 해야지."
술냄새에 섞인 그의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불편하다.
앉기도 전에 종이컵을 내밀며 소주를 따라주려고 한다.
"아뇨. 전 안 먹을게요. 저 이 술자리 안 한다고 말하러 온 거예요."
나는 술을 똥처럼 여겼다.
그런데 이 형이 내게 그걸 먹으라 계속 강요하고 있다.
당구 졌다고 술로 앙갚음하려는 것 같다.
"한 잔만 받아."
"아니요. 안 먹을게요."
당구도 안되면서 포기를 모르더니, 지금도 그렇다.
"흠..., 받으라고!"
이건 권유를 넘어선 강요다.
순간, 불편함을 넘어 화가 났다.
"안 먹는다고!"
나도 모르게 반말이 공격적으로 튀어나왔다.
그 순간, 음소거 버튼이 눌린 듯 방이 조용해졌다.
'퍽'
종대 형은 침대 바닥을 손바닥으로 내리치고,
매트를 있는 힘껏 세게 누르고 있다.
마치 리모컨의 소리(+) 버튼을 꾹 누르고,
이 방에 자기 목소리를 가득 채우며,
내 안에 두려움의 소리를 키우려는 것 같았다.
그가 폭발했다.
"아~ 이, 씨 발 새 끼 가."
난 갑작스러운 그의 욕설에 움찔했다.
방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살벌해졌다.
잠시 후, 모두 바닥에 무릎을 꿇으라 한다.
이건 뭐 그냥 아주
신입생 O.T를 2박 3일로 갔을 때였다.
상상했던 대학의 모습이 그때 다 깨졌다.
예비역 선배들이 머리박기, 얼차려, 선착순 등을 하며 군기를 잡았다.
이게 대학인지, 군대인지 몰랐다.
여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기 여자들은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밤에 술자리에서는 더 진상들이었다.
그건 대학의 꿈을 품은
신입생들을 위한 OT가 아니었다.
이건 뭐 그냥 아주
신입생들을 바닥에 무릎 꿇리고,
실망시켜 쓰러지게 만든 꼴(OTL)
그 자체였다.
난 우리 과의 이런 문화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은 부적응자가 되었다.
그게 학교에서 예비역들과 함께한 처음이자 마지막 과모임이었다.
입학해서 대학 잔디밭, 개강파티 등 예비역이 있는 그 어떤 모임도 나가지 않았다.
이 문화에 완벽한 적응자가 종대형이었다.
그의 이런 모습을 처음 봤다. 그러나 나에게 그 횟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누구라도 단 한 번의 용납이 안 됐다.
이제 그는 나에게 술을 강요했고, 폭언을 한 사람일 뿐이다.
누군가가 술 먹고 나에게 이럴 때면,
무언가 나를 구속하러 조여 오는 느낌이다.
그리고 언제나 이 느낌은 가슴에 분노라는 불씨를 건드린다.
누르고, 당기고
종대형은 예비역 선배들과 많이 어울리는 편이었다.
좋아하는 형은 아니어서 가깝게 지내진 않았다.
그렇다고 멀리할 이유도 없던 형이었다.
기숙사 선배이기에 마주칠 수밖에 없는 형이기도 했다.
아무 일 없이 그런대로 잘 지내왔었다.
그런데 오늘 그에게서 O.T때 예비역들 모습이 보인다.
동기들은 선배들과 술을 먹고 지내서 그런가?
이 문화에 익숙해진 것일까?
모두가 조금도 거부하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
난 그대로 서있었다.
종대형이 내 머리를 툭툭 치며 말한다.
"넌 왜 안 꿇는데?"
분노의 불씨가 불타기 시작했다.
눈을 치켜뜨고 바라보았다.
"아, 얜 좀 안 되겠다."
동기들이 꿇으라고 내 바지를 잡아당기고 있다.
"이 씨발놈아! 안 꿇어?"
그는 내 왼쪽 뺨을 세게 때렸다.
내 머리를 움켜잡고 아래로 강하게 눌렀다.
"꿇으라고. 너 이러다 죽어."
그때 누군가 내 무릎 안쪽을 쳤다.
위에서 누르고, 아래서 당기는데
난 결국 주저앉었다.
무언가 턱 밑까지 차올랐다.
입술이 심하게 떨리고,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종대 선배는 침대 중간에 책상다리를 하고 말했다.
"별것도 아닌 왕따 새끼가 존나 신경 쓰이게 하네. 진짜. 후우. 야!"
종대형은 예비역들하고 많이 어울린다고 알고 있었다.
동기들 말에 의하면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난 그가 친구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런 네가 나를 왕따라 한다고? 어이가 없네. 게다가 룸메이트도 없는 주제가 나한테 왕따라고?'
높은 곳, 낮은 곳
그런데 지금 이 생각들이 다 깨졌다.
오늘을 위해,
다 그가 계획한 것이었다.
군기 잡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예비역을 졸졸 따라다닌 거다.
2인 1실의 방구조를 변경하기 위해,
층장의 특권으로 룸메이트 배정을 안 한 거다.
혼자 넓게 쓰기 위해,
침대를 하나 빼낸 거다.
왜?
후배들을 무릎 꿇리기 위해,
넓은 바닥이 필요했던 것이다.
더 높은 위치에서
96학번 2명, 97학번 4명을
내리깔아보고 싶어서...
"너네 눈 감아봐라. 니들 중에 혹시 선배 때리고 싶은 놈 있나?"
감은 두 눈, 검은 화면 속
술 먹고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고,
그런 이들의 강요와 공격성까지 보게 되면,
난 여지없이 한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제는 이 필름이 끊어질 만한 것도 같은데,
내가 술을 안 먹어서 그런가, 끊기지가 않는다.
여전히 특정 시점에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리고 난 이 영상을 무조건 봐야만 한다.
감은 두 눈, 검은 화면 속에
술을 그토록 싫어했던 지난날의 영상 하나가 재생된다.
아버지는 술 취해 비틀거리며 서있다.
어머니는 맞고 쓰러져 있다.
난 소리를 지른다.
어머니는 날 감싸고 형의 눈치를 본다.
형은 내가 분노를 표출했다고 내 뺨을 때린다.
그 후, 아버지에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난 형에게 또 맞을까 봐 떨고 있다.
나는 숨이 막혀 어머니 품에서조차 벗어나고 싶어 한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장면에서 벗어나고 싶다.
내게 묻은 술과 폭력의 냄새를 어떻게 지우지?
어떻게 맞서야 하는 걸까?
그 순간,
종대형의 말이 나에게 이렇게 다가왔다.
'이 상황에서 탈출하고픈 사람 손 들어봐라.'
호흡이 가빠지면서 심장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번에 손을 못 들면, 평생 못할 것만 같았다.
턱 밑에 걸려있던 것을 밖으로 꺼냈다.
"저요!"
동시에 손도 번쩍 들어 올렸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술도 안 먹었는데 얼굴은 새빨개져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두 가지의 질문이 수없이 교차반복된다.
종대, 이 새끼야. 네가 뭔데? 뭘 어쩌라고? 꼴 값 떨지 마.
그리고
도중아, 네가 뭘 할 수 있겠어? 바뀔 것 같아? 너만 이상한 사람 돼.
내가 맞서려는 게 과연
저 앞의 종대형일까?
어쩌면 진짜 싸움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일까?
내 안의 나인 건가?
대체 어떻게 맞서야 하는 걸까?
도통 이 상황이 끝나지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