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그렇게 잘났어?
2011. 따스한 봄날
그녀의 그늘이 짙다
"최 선생님은 자리배치를 이렇게 안 하시던데. 최 선생님은 책상배치를 이렇게 안 하셨는데...."
'최 선생님은 마~그러니까~마 최 선생님은~마...... 으악. 스트레스와 짜증에 환청이 들린다. 최 최 최 최...... 이건 뭐 최샘과의 전쟁도 아니고. 후우.'
그 해 최 샘의 후임으로 수업을 맡게 된 유치원이 있었다. 벌써 3개월이 지났지만 그녀의 그늘을 조금도 걷어내지 못했다. 준비 많이 한다고 하는데도 안된다. 그녀가 남기고 간 그늘이 너무 짙다. 특히 유치원 원장님은 그녀의 광팬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대기표를 뽑다
여기서 잠깐! 최 샘 소개부터 하자면 그녀는 지국 내에서 베테랑이다. 그녀의 수업을 받기 위해 어머님들이 대기표를 뽑아 들고 있다. 월~금 꽉 찬 수업일정에 토일을 보강수업으로 사용하는데 대기순위 1번이라도 수업받기가 쉽지 않다. 어머님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니 소개도 많이 받는다. 무작정 대기하게 하다간 아이가 커버려 수업대상연령이 지나간다. 지국장님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어머님들의 높은 기대치를 충족시켜야 한다. 최 샘이 있어 지국장님은 살 맛 나고 나는 죽을 맛이다. 혹시나 최 샘의 대기 수업을 맡을 때 오는 부담감 때문이다. 이건 무지 잘해야 본전 같은 느낌이다.
2010. 바람이 분다
끝까지 책임을 다하다
최 샘이 임신을 하였다. 새 생명의 바람이 불어왔고 나에겐 후임으로 들어가기 싫은 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휴직 결정 시기는 모두의 관심사였다. 인수인계 시기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행여나 당장일까 봐 모두가 우려했다. 그러나 최샘은 진행하고 있는 수업과정을 끝까지 모두 완수했다. 지국의 일정(홍보일정, 교육일정 등)도 원활히 흐를 수 있도록 끝까지 책임을 다했다. 어머님들이 수업을 이어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 역시 기우였다. 최 샘은 지국의 얼굴이었고 그녀에 대한 신뢰는 지국에 대한 신뢰로 이어져있었다. 어머님들 대다수는 다음 프로그램으로 수업을 이어가길 희망하였다.
2010. 차갑던 겨울날
두 개의 관문을 통과하다
내가 배정을 받은 수업은 홈수업보다 유치원, 어린이집 수업이 많았다. 그중 높은 난도를 자랑했던 유치원이 있었다. 난이도의 평가기준은 선생님들의 반응이다. 다들 들어가기 싫어하는 유치원이었는데 최 샘이 몇 년간 출강했다면 말 다했다. 다음 해 봄부터 들어가게 되었다. 글 초반에 언급했던 유치원이다. 일단 원장님은 남자를 선호하지 않는다. 이것이 첫 번째 관문이다. 지국에서 남자가 들어간 적이 없는 유치원이었다. 이 난관을 지국장님은 기어이 뚫어냈다. 동료가 어려운 난관 하나를 이겨내면 기쁜 일인데 기쁘기는커녕 한숨이 나왔다. 난 만난 적도 없는 원장님의 굳은 의지를 응원했었다. 그때 내 동료는 원장님이었다. 멀리서 간절히 응원했던 원장님을 처음 만나러 얼굴 도장을 찍으러 갔다. 인수인계 과정에서 통과의례로 전임 선생님의 수업을 참관한다. 내가 영향을 끼쳐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두 번째 관문이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잘 보이려는 의욕을 억지라도 내려놓아야 한다. 이 관문에서 원장님이 날 마음에 안 들어하면 아주 나이스한 일이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로 합리화하며 성의 없는 인사를 하려는데 이 반응 뭐지. 날 얼마나 띄워놨길래 원장님, 원감님, 주임선생님 이하 모두의 표정이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건 띄운 이미지에 부합할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으악! 이대로라면 봄학기부터 수업배정 확정이다. 그러나 이미 그녀들의 웃음에 헤벌쭉 무장해제 된 것도 모자라 얼굴은 빨개졌고 마음은 기쁨에 흥건해졌다. 돌릴 수 있는 기회는 이제 하나다. 입을 살며시 열어 이 기쁨을 침과 함께 질질 흘리면 된다. 그녀들 특히 원장님 앞이어야 한다. 그러면 변태로 오해받아 후임이 무산될 가능성 있다. 유아교육시설에서 변태 남선생은 퇴출 1순위다. 난 꿀꺽하고 없던 침마저 마음에 쑤셔 넣고 밝게 인사했다. 그녀들에게 예정에 없던 웃음으로 화답까지 하였다. 심지어 '관문을 무조건 통과해 이 원에 들어와야 한다. 그래. 가보자! 이 원 마음에 드네.'라며 강한 의지를 내뿜는다. 어깨를 펴고 입을 귀에 걸었으니 아이들도 반가워한다. 그녀들의 누군가의 웃음은 언제나 기분 째지는 일이다. 통과 못하게 지키려 했던 두 개의 관문을 열어젖혔다.
어디 한 번 보자
아이들을 인솔해 특강수업교실로 이동하여야 했기에 최 샘은 한 줄 기차의 맨 앞 칸 기관사가 되고 나는 맨 끝 칸이 되었다. 드디어 교실도착. 원에 오기 싫었던 생각은 온데간데없다. '여긴 내가 맡을 유치원이고 나와 봄에 만날 아이들이다. 누가 뭐래도 내가 이어간다. 최 샘 네가 그렇게 잘났어? 어디 한 번 보자. 수첩과 볼펜을 꺼내 들었다. 당신도 심사평해 줄게.'
음......
지국에선 수업 연습을 시도 때도 없이 한다. 그때마다 새빨간 얼굴에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디션장을 방불케 한다. 아이들 대역으로 선생님 몇 명을 선정한 후 난 수업을 진행한다. 뒷자리에 심사위원들 중 최 샘은 늘 앉아있었다. 그리고 심사평. 최샘은 차분히 읊조리며 할 말 다한다. 그래도 말해줄 때가 낫다. 음...... 하다가 지나칠 때가 있는데 이거 은근히 기분 나쁘다. 소위 현타가 살짝 온다. 이런저런 그녀에 대한 스트레스가 쌓여 소심한 복수를 감행하려 했다.
하룻밤 두 번의 첫 경험
그날 밤에 알게 되었다. 복수자체가 안된다는 것을. 누구의 수업을 보면서 소름이 끼친 첫 경험이었다. 얼굴에 침을 세게 맞은 듯 놀랐다. 40분 수업동안 엇나가는 아이들 하나 없고 잠시 흐름이 끊겨 어수선해질 수 있는 틈마저 쉴 틈 없이 연결하였다. 제일 놀라웠던 건 아이들 입가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수업은 어찌 보면 시끄럽다는 표현이 맞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건 뭐랄까. 자유로운 질서였다.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행복의 여러 가지 소리들이 뛰어노는 듯했다. 흩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개개인의 행복이 모여 하나가 되는 소리였다. 소문으로만 듣다가 직접 본 장면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이제 좀 되는 것 같다고 자만하며 성장이 멈춘 채 매너리즘에 빠져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한 첫 경험이었다. 그날 밤 눈을 감고 입사 면접 때 열었던 그 문을 다시 거슬러 들어갔다.
2008. 뜨겁던 여름날
네가 그렇게 잘났어?
면접을 보러 사무실에 갔다. 지국장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녹차 한 잔을 내어주었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설렘을 담기에 잔이 제법 크고 근사해 보였다. 뜨겁던 그 해 여름 이 찻잔에 담은 건 나의 초심이었다. 그 마음이 뜨겁던 차와 함께 서서히 식어가고 있는 줄도 몰랐고 이 초심이 식기 전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런 찻잔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지냈고 감사하게도 이 날 최 OO 선생님 덕분에 지난날을 깊게 돌아보게 되었다. 자만하며 잠든 많은 밤과 나태한 겨울날들이 지나며 차갑게 식어버린 찻잔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찻잔에 떨어져 있는 자만과 나태는 마치 전장에 나가 녹슨 칼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내게 말했다.
네가...... 마. 니그 국장님이...... 마. 어렵게 뚫은..... 마.
네가...... 마. 니 그 실력으로..... 마. 복수를 한다고... 마. 네가....... 뭔데?
"네가 그렇게 잘났어?"
그 누구와의 전쟁도 아니었다. 내 안에서 싸우는 나와 나의 전쟁이었다.
이 술잔이 식기 전에
이 술잔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소
청룡언월도 힘차게 휘두르고 돌아와
술잔을 든다
사수관에 선 관운장이 바라본 술잔을 몰래 보다가 잠에 취했다. 기억도 안나는 그날의 꿈을 오늘 꿔본다. 인생의 관문마다 고민하고 갈등하며 세운 초심을 사수하기 위해 저마다 전쟁 같은 삶을 산다. 이 전장에 나가기 전 녹차 한 잔 준비하고 칼을 차며 감히 관운장을 따라 해 본다.
이 찻잔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소
녹슨 칼에 허세 두르고 허공에 휘두르니
무엇 하나 제대로 베지 못한 채 돌아와
식어 버린 찻잔에 녹가루를 떨어뜨린다
다행이다 늦게라도 돌아와
대지 위에 초록을 피우려 할 수 있어서
지난 전장 모든 곳에 내가 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나와의 전쟁
나를 이기면 내가 진다
전장에 지는 노을에 비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고생했고 애썼어
지친 나를 감싸니 마음의 온기가 피어오른다
저벅저벅
전장에 누군가 오고 있다. 내 옆에 섰다.
(구텐) 탁!
(구덴) 탁!
(그댄) 탁!
일어나자
고등학교 야자(야간자율학습) 시간
당직이었던 독일어 선생님이
녹슬지 않는 나무 지휘봉으로
노을빛 책상을 치며 날 깨웠다
그 어릴 적 야자시간
몰래 보던 삼국지에 흘린 침이
세월을 넘나들며 일침을 가하고 지나갔다
일어나자
그댄 탁! 하고 잠을 깨
달그림자 뒤로 하고 책가방 싸던
그 시절 내가 말한다
30년 후 나에게......
뜨거운 여름 아침햇살은 반드시 돌아와. 힘든 일도 많겠지만 넌 일어날 거야. 꼭 그럴 거야. 거기까지 가느라 고생했고 애썼어. 힘내. 무엇보다 건강하고.
*Guten Tag (구텐 탁): 독일어 점심 인사
3초의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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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가베 가족?
*2 가베의 구성은 구, 정육면체, 원기둥이다
우리 가족의 구성원은
구 엄마, 정육면체 아빠, 원기둥인 나이다
데굴데굴 구르는 엄마
바위처럼 튼튼한 아빠
엄마처럼 굴러야 하는 거야?
아빠처럼 서있어야 하는 거야?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뭘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ㅠㅠ
아무것도 하지 말까?
아이는 커가며
엄마 따라 구르고 아빠 따라 서있고
"히히 따라 하다 보니 두 개를 다 할 수 있네"
"난 구를 수도 있고 서 있을 수도 있다"
"아빠 엄마 고마워요 원기둥으로 낳아주셔서 히히"
모방도 문제해결의 한 방법이라고 바라볼 3초의 여유
*가베: 독일의 교육학자 프리드리히 프뢰벨이 구현한 놀잇감. 1~10 가베로 구성되어 있다. 입체, 선, 면, 점으로 구성되어 있는 유아기 놀이학습의 대표적인 교구이다.
최샘은 산달이 되어서야 지국을 떠났다. 지금 와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니 참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지금도 그 첫 참관 때 봤던 교실 분위기가 선명하다. 나에게 수업에서만큼은 관운장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연출해 본 적이 없다.
뜨겁던 여름에 시작해 차갑던 겨울을 지나 따스한 봄바람을 맞으며 말한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