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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사랑방

01 할아버지의 사랑방

by 김호진 Mar 19. 2025

'높은 집 손자구나'


마을 어른들은 허리를 굽혀 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하는 말이었다. 흙담 사이의 좁은 골목길에서 어른들과 마주치면 나는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얼른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마을 어떤 곳이라도 어른들을 만나면 먼저 다가가 큰 소리로 인사를 올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골목길에서 만나는 남자 어른들은 무명옷이나 삼베로 짠 옷을 입고 곰방대를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여자 어른들은 치마저고리에 긴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기고 비녀를 꽂고 있었다.  그분들의 늘 환하게 웃었다. 내가 사는 집은 마을의 한가운데 있었다. 골목에서 마당까지 들어가는 길이 가풀막졌다. 다른 집에 비해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늘 '높은 집'이라고 불렀다.


삽작문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없었다. 마당으로 들어서면 왼편에 사랑채가 있고, 정면으로 높은 뜰과 대청마루가 돋보이는 본채가 정남향으로 묵직하게 앉아 있다. 본채는 마루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안방과 부엌이 있고 동쪽으로 작은 방이 하나 더 있다. 투박하지만 오래된 소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부엌문은 문고리가 내 키보다 놓은 높은 곳에 달려 있다. 부엌 뒷문을 지나면 둥글게 돌을 쌓아 올려 만든 우물이 있었다. 우물 옆에 있는 작은 꽃밭에는 매년 키 작은 채송화와 봉숭아와 키 큰 과꽃이 빼곡하게 피어났다. 뒤 뜰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야생화가 가을까지 피고 지기를 반복했다. 


사랑채 옆으로 소 외양간과 나락을 보관하는 두지, 부엌에서 나오는 재를 모으는 곳, 소금단지와 각종 도구를 보관하는 창고가 딸려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직접 개량한 사랑채는 초가지붕이었고, 본채는 마을에서 몇 안 되는 기와지붕이었다. 마당은 내가 아는 한 다른 집보다 몇 배나 넓었다. 마당에서 두 계단 올라 뜰이 있고 대청마루도 디딤돌을 올라서야 올라갈 수 있다. 마루에 올라서면 나지막이 내려앉은 아랫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두 해 전, 내가 다섯 살 무렵이었을 때 본채의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기와지붕으로 새 단장을 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일이 몇 가지 있었다. 그때 나는 할아버지 사랑방 앞마당에 서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지붕으로 기와를 올리는 사람, 지붕에서 기와를 정확하게 자리를 잡으려고 요리조리 재어 보는 사람, 마당에는 마을 어른들이 여럿 모여 구경을 하거나 집 짓는 일을 거들기도 하는 모습이 빛바랜 그림처럼 떠오르곤 했다. 


이웃집들은 모두 초가집이었다. 오래된 초가지붕은 짚이 썩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초가지붕은 2년이나 3년에 한 번씩 새로 엮은 이엉을 얹었다. 이엉을 얹기 전에 전에 깔았던 썩은 이엉을 둘둘 말아서 거둬냈다. 썩은 이엉을 펼쳐 놓으면 닭들이 썩은 이엉 안에서 살이 통통하게 오른 굼벵이를 쪼아 먹기도 했다. 이엉을 제 때 새것으로 덮지 않은 집은 장마철에는 천정에선 물이 뚝뚝 떨어져 낭패를 보기도 했다. 그래서 기와지붕은 초가지붕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자 꿈의 집이었다. 


마을은 대략 200호으로 인근에서 제일 큰 마을이었다. 마을 앞 신작로를 따라 작은 가게가 여럿 있었는데 진열대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술을 먹을 수 있는 방이 몇 개 있었다. 낮부터 얼큰하게 취한 어른들도 간혹 있었지만 주로 밤이 되면 어른들만의 공간이었다. 가끔 할아버지 사랑방에서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가게 뒷방 골방에서 저녁마다 술판과 화투놀음판이 벌어진다고 했다. 그중에서 친구 아버지가 관련된 사건도 있었다. 작년 어느 겨울밤이었다. 도회지에서 온 놀음꾼들과 붙어 돈을 크게 잃었다고 했다. 심지어 땅문서까지 날려버린 사람도 있다고 했다. 돈을 잃은 마을 사람들은 힘 꽤나 쓰는 젊은이로 농사를 크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중에 친구 아버지도 있었다. 도회지에서 온 사람들은 화투를 다루는 솜씨가 좋았다고 한다. 이런 도회지 깍쟁이한테 한 번 물리면 밤 사이 모두 빈털터리가 된다. 새벽녘 방문을 나설 때는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 인근 마을도 당한 사람이 부지기수라면서 조심하라는 소문이 마을에서 마을로 퍼져 나갔다.

철망으로 가려 놓은 가게 안에는 과자류와 잡화를 진열해 놓고 있었다. 주인은 안채에서 술을 팔거나 집안일을 하기 때문에 가게에는 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게 안에 있는 사탕이나 과자를 사서 먹어 본 적이 없다. 돈이라는 것을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보리나 벼 타작하는 날에 막걸리를 사러 간 적은 있었다. 양은으로 만든 커다란 주전자를 들고 가면 주인은 막걸리 단지를 보관하는 방으로 데려갔다. 그 방은 낮에도 어둑하고 서늘했다. 



나는 본채 안방에서 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건넌방은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살던 방이었다. 하지만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었다. 기름이 말라 가물거리는 등잔불처럼 희미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어머니와 함께 부엌에서 겪었던 일이었다. 그날은 친구들과 일찍 헤어졌다. 늦은 오후 마당으로 막 들어서는데 어머니께서 나를 부엌으로 불렀다. 부뚜막에 놓인 자그마한 단지를 보고 계셨다. 나는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귀한 단지라는 것은 눈치챘다. 어머니께서는 단지 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깊이 넣었다가 꺼냈다. 그리고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너무나 부드럽고 달콤하여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것은 고욤나무 열매라고 했다. 고욤나무는 뒤 뜰 끝에 있는 늙은 감나무 근처에 있었다. 고욤나무 열매는 너무 작고 떫어서 먹을 수 없는 열매로 알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맛이 나는지 궁금했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할머니께서 꿀을 조금 얻었는데 고욤나무 열매를 따서 함께 단지에 넣어두었다고 했다. 할아버지 기침에 좋다고 했다. 할아버지 드리려고 찬장 아래 깊숙이 보관하던 것을 어머니께서 오늘 처음으로 꺼내어 먹게 해 준 것이었다. 할머니 몰래 단지를 연 어머니는 자신은 맛을 보지 않았다. 고욤나무 열매가 내 목구멍을 채 넘어가기도 전에 어머니는 얼른 단지를 덮고 찬장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또 한 가지는 섬뜩할 정도로 놀라운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삼촌의 여자친구가 우리 우물에 들어갔던 사건이었다. 그날도 나는 어머니와 부엌에 함께 있었다. 삐거덕 하면서 부엌 뒷문이 열리고 어머니와 나는 뒷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자 젊은 여자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어머니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말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서야 어머니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그녀가 우물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누가 꺼내주었는지는 모르지만 놀라운 사건이었다. 나중에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나누는 이야기에 의하면 삼촌이 여자 친구 몰래 고향을 떠나 서울로 떠났고, 여자 친구는 삼촌의 연락처를 알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누구 하나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삼촌은 가출하듯이 그렇게 어느 날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던 것이다.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그렇게 자기를 버리고 떠난 것에 원망과 그리움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소 있었다. 친구들에게 연줄을 대어 수소문하던 그녀는 기다림에 지쳐 우리 집 귀신이 되겠다는 각오로 우물로 들어간 것이다. 깊은 우물에 어떻게 들어갔다가 또다시 나올 수 있었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께서 머물던 사랑방은 늘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랑방은 골목길에서 집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사랑방은 할아버지께서 사랑방으로 하자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하면서 저절로 사랑방이 된 것이다. 사랑방으로 안성맞춤인 이유가 있었다. 우선 우리 집이 마을 한가운데에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곳에 모여서 무슨 작당을 해도 주변에서 알아차리기 힘들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할아버지께서 아주 좋은 사람으로 평판이 나 있고 인심이 좋다는 것이다. 


할머니와 나는 사랑방에 누가 오고 가는지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사랑방에서 하는 일에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마당이나 입구 골목길에서 마주치면 눈인사 정도는 나누는 것으로 보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는 농사일이나 집안의 대소사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외에 일은 서로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않았다. 


사랑채에서 주로 계시는 할아버지는 식사 시간에만 안방으로 오셨다. 제삿날이나 명절, 그리고 손님이 왔을 때도 볼 일만 끝나면 바로 사랑채로 가셨다. 할아버지께서 기거하는 사랑채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사람들로 붐볐다. 온 동네 어른 남자들에게 항시 열려있는 방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사랑방에 간다고 하면 으레 껏 높은 집 사랑방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농사철에는 저녁에만 모이지만 추수가 끝난 늦가을부터 이듬해 농사일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낮 밤을 가리지 않고 모여 앉아 있었다. 매일 오는 손님들은 아침 숟가락을 놓자 말자 사랑방으로 왔다. 조금이라도 늦은 지는 날에는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루에 앉아서 어정거리다 가야만 했다. 나는 가끔 마루에서 놀거나 마당에서 놀다가 사랑방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았지만 친구 대국이 아버지나 빈내 아저씨 그리고 서부할아버지 이외는 낯선 사람들이었다. 대국이 아버지가 오시는 날은 틀림없는 일요일이었다. 유일하게 김천시에 있는 담배 공장에 다니기 때문에 쉬는 날이면 모습을 보였다. 대국이 아버지께서는 늘 나에게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다가와 큰 손으로 번쩍 안아 들어보곤 했다. 대국이와 나를 비교해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대국이는 나보다 한 달 늦게 태어났다. 그런데 키는 나보다 더 컸다. 


나는 손님들이 있을 때 사랑방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은 없다. 사랑방 뜰에는 늘 고무신들이 늘려 있었다. 검정고무신과 오래되어 누렇게 변한 흰색 고무신을 보면 사랑방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밤이 깊어 사랑방 손님들이 하나 둘 골목길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면 멀리서 개 짖는 소리, 바람에 삐거덕 거리는 외양간 문 소리, 쥐들이 마루 밑에서 소란 피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시끌벅적했던 사랑방은 이제 할아버지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탁한 기침소리가 대신했다. 할아버지는 늘 목에서 '가르릉 가르릉'하는 소리가 났다. 밤이 깊어질수록 기침이 점점 더 심해져서 쉼 없이 쿨룩거렸다. 새벽닭 울음소리에 잠을 깼을 때도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는 들렸다. 할아버지 가슴은 지금 얼마나 따가울까. 내 마음도 아팠다. 기침이 멈추지 않는데 '할아버지는 잠을 주무시기는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힘들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한 번도 할아버지께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묻지는 않았다. 할아버지께 무슨 말을 해 드리고 싶은데 막상 할아버지와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냥 할아버지가 하는 일을 도와 드리는 것으로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때쯤, 할머니께서 푸념하듯이 내뱉는 이야기를 듣고 할아버지 병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 말씀은 이러했다. 

할머니께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구례실 마을에서 20 리쯤 떨어져 있는 송문골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열여덟 살에 시집을 와서 처음에는 큰 집에서 살았다고 했다. 대가족으로 3대가 함께 살았다고 한다. 일 념 후 작고 허름한 집을 마련하게 되면서 따로 살게 되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위로 형님이 한 분 계셨다. 나는 '큰집 할부지'라고 불렀다. 큰 집은 마을에서 꽤나 부잣집으로 알려져 있었다. 큰 할아버지는 농사일은 직접 하지 않았다. 대신에 일꾼들이 여러 명 있었다. 한 번은 큰 집에 갔다가 점심을 먹게 되었다. 일꾼들도 마당 멍석에 앉았다. 오전 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들어온 모양이다. 신기한 일은 일꾼들이 먹는 그릇과 밥의 양이었다. 큰 그룻에 그릇 높이보다 높은 밥이 쌓여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밥을 단숨에 뚝딱 해 치우는 것이었다. 나는 일꾼들이 힘이 세고 농사일을 잘하는 이유가 밥의 양이라고 결론지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큰 집에서 나올 때 농사 지을 땅을 조금 받았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장남에게 대부분을 물려주고 차남에게는 집을 나올 때 살 집과 먹고 살 정도의 땅만 물려준다고 하였다. 시집을 온 후에 할아버지와 죽으라 일만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지금의 큰 집을 장만하고 땅도 많이 샀다고 하였다. 가래가 끓고 기침이 심하게 된 것은 농사일로 너무 몸을 혹사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따로 살게 된 후에도 할아버지는 큰 집 농사일은 계속 한 모양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몸을 무리하게 일을 해서 병이 났던 그 해에는 가뭄이 들어서 모내기할 논에 물을 데는 일에 온종일 매달리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형 논까지 모내기 논에 물 대는 일을 함께 하다 보니 몇 날 며칠을 집에 오지 못하고 밤에도 물을 퍼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때 이후에 저렇게 골병이 들어서 기침을 심하게 하게 되었다고 했다. 기침이 심하게 나와도 병원을 가거나 약을 먹어 본 적은 없다고 했다. 고모가 자주 콜록 거리는 것도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도 할머니는 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았다. 늘 큰 집 할머니에게 형님이라고 하면서 예의 바르게 대하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달리 술을 잘 드시고 담배도 피웠다. 힘든 농사일을 하다 보니 막걸리를 마시지 않고는 일을 할 수 없었다. 담배는 할머니 친구들과 일하다가 쉴 때 꽁초 담배를 피우면서 고통을 이겨냈다고 했다. 또 할머니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저녁에는 무조건 친구집으로 가는데 나 때문에 쉽게 나서지 못했다. 내가 잠든 후에야 집을 나섰다. 


어떤 날은 내가 초저녁에 잠이 들어 늦은 밤에 깰 때가 있었다. 밤에 혼자 있는 것이 너무 무서워  그럴 때면 나는 늘 소리 높여  할아버지를 찾았다. 잠시 후 사랑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마당을 가로질러 천천히 할아버지께서 오셨다.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께서 사랑방에서 안방으로 오는 날이다. 할아버지는 꼼짝없이 손자 때문에 말없이 계시다가 내가 잠이 든 다음에 사랑방으로 내려가시곤 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께 그런 일이 있는 다음 날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수없이 반복되었지만 한 번도 그 일로 할머니께 이야기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가축과 농사일 이외의 집안일에 대해서는 일체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사랑방에서 농사를 준비하고 농사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고질병인 천식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가랑가랑하는 숨소리와 함께 폐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기침을 달고 살았다. 기침소리와 함께 사랑방을 지켰다. 논이나 밭에 나가는 경우를 제외하면 이웃집이나 가까운 친적집을 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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