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마중 나갈게.
2025년 11월 14일 오후 3시
"엄마 아빠 마중 좀 다녀올게."
큰 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빠를 왜?'라는 글씨가 얼굴에 크게 도배되어 있는 게 다 보인다.
"그게 있잖아..."
[며칠 전, 엄마가 아빠가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오신다는 말에, 버선발로 쪼르르 달려 나가서 양팔을 쭉 들고 환영해 주니, 아빠가 함박웃음을 지으시는 거야. 엘리베이터 앞에 센서등이 안 켜져서 복도가 새까만데도, 네 아빠가 환하게 웃는 얼굴이 다 보이더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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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남편은 느지막이 회식을 갔다. 점심만 먹고 돌아온다고 했다.
돌아오는 시간을 얼추 보니, 마중을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여보, 몇 시에 도착이야? 내가 마중 나갈게.
- 에엥? 왜? 혹시~ 뭐 장 볼 거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지?
- 아냐 아냐~ 그냥 마중 나가고 싶어서.
남편의 말을 듣고 나니, 못다 쓴 마트상품권 생각이 났다. 전철역에는 마트가 붙어있다. 장 볼 건 없지만, 상품권은 좀 쓰고 와야겠다. 나는 거짓말한 게 아니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왔다. 이틀은 둘째 독감 때문에, 하루는 큰애의 재량휴일 때문에. 며칠을 집에 갇혀있었더니 당최 바깥날씨를 유추할 수가 없다. 괜스레 큰애한테 춥냐, 덥냐 채근해 본다. 어차피 날씨를 느끼는 것은 각자 몫인데. 굳이~ 물어보고 또 물어보다가. 그냥 따듯하게 입자 싶어서 패딩을 꺼내 입고 나왔다.
공기는 차가웠다.
세상은 온통 가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시선 두는 곳마다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다. 쓰레기 버리는 곳도, 놀이터도, 전철역으로 통하는 아파트 뒷길도, 아이들 학교 등굣길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예뻤다.
-예정보다 좀 일찍 도착할 것 같아.
남편의 톡을 보고, 두리번거리는 고갯짓을 멈추고 발걸음을 서두른다.
퇴근하고 나면 피곤할 법도 한데, 딸아이를 마중가기도 하는 남편.
어쩌다가 내가 늦게 돌아올 때면, 아이들을 봐주다가도 또 나를 마중 나오기도 하는 남편.
가끔 일찍 올 때면 하교하는 둘째를 마중 나가기도 하는 남편.
오늘은 내가 남편을 마중 나간다.
마트에 먼저 도착해서, 의자에 앉아서 남편을 기다린다.
-여보, 마트로 와.
메시지를 보내고 앉아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우리 데이트하던 시절에는 핸드폰이 없었다. 서로 약속 시간을 정하면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상대를 기다려야 했다. 길거리 차가운 시멘트 화단에 기대어서 오고 가는 사람들 속에서 서로를 찾았다. 내가 모르는 낯선이들 속에서 익숙한 그의 얼굴이 보이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긴장감이 들곤 했다.
'오늘 내가 무슨 옷을 입었지? 나, 화장이 뜨진 않았겠지? 거울을 좀 볼 걸.'
예뻐 보이려고 입은 짧은 치마가 거슬린다. 손 끝을 짧은 치맛단에 가져다 대고 조금씩 아래로 끌어내리며, 환하게 웃어야 할지, 살짝 웃어야 할지 몰라 영 샐쭉한 얼굴로 그를 맞이하던 이십 대의 나.
이제는 마트 한편에 편한 자리를 찾아서 대충 다리를 꼬고 앉아, 핸드폰을 보며 기다린다. 거울에 살짝 비친 내 표정을 보니 세상 무심하고 심드렁하기 그지없다. 설레임? 설레임은 아이스크림 먹을 때나 찾는 거지..
"여보! 여기야!"
손을 번쩍 들고, 남편을 부른다. 남편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마트 입구로 들어와서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고 있었다. 멋이라고는 일절 부리지 않은 덥수룩한 머리의 내 남편. 내 옷은 그렇게 사라고 하며, 정작 본인은 맨날 입던 것만 입지. 내 목소리에 남편은 내쪽을 보면서 환하게 웃는다. 그런 남편을 보면서 나도 활짝 웃는다. 긴치마를 입고, 편한 잠바를 입고. 립스틱이 지워졌는지, 눈썹이 비뚤어졌는지, 그런 것 하나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편에게 다가간다.
팔짱을 쓱 끼고서,
"여보, 우리 마트 갔다 오자."
"아까 장 안 본다면서?"
"응~ 장은 안 볼 거야. 상품권만 쓰고 오려고."
남편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런 남편에게 빙구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 그의 팔을 잡아끌고는 마트로 향한다. 남편은 마지못해 끌려오다가 이내 허허 웃으며, 카트를 가져온다. 나는 '조금만 살 거야, 조금만.'이라면서 카트에 물건을 담는다. 남편은 '내 이럴 줄 알았다.' 하며, 지친 발걸음을 기꺼이 옮겨 준다.
장바구니에 툭 튀어나온 대파 한단이 우습다.
큰애가 학원에 가기 전에 먹일 저녁거리가 필요했기도 했다.
나는 오늘 먹은 점심회식은 맛있었냐고 물어본다.
남편은 비싸기만 하지, 뭐 그냥 그랬다며 손사래를 친다.
돈 많이 벌어서 나도 데려가라고 했다.
그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었다.
돌아가는 길가의 풍경이 마치 꿈속을 걷는 듯, 아름다웠다.
분홍빛 봄꽃 같던 우리 사이가 어느새 빨간 단풍이 되어 익어가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하루가 '남편 마중'으로 어쩐지 특별해지는 오늘이었다.
그래요 저 남편 좋아해요
미안합니다 좋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