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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온도는 늘 같을 수 없다.

그럼에도 함께 시간을 보내줘서 고마워.

by Wishbluee

2025년 11월 18일 저녁 6시


오늘은 남편과 삼성역에 갔다.

같이 보고 싶은 전시가 있어서 표를 미리 사두고, 하루만 데이트하자고 졸랐다.

그런데 남편은 나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했다.

괜스레 기분이 상해서, 그럼 됐다고 혼자 간다고 삐친 티를 잔뜩 냈더니, 마지못해 하루를 내어 온 것이다.


전시는 나폴리 한 미술관의 19세기 컬렉션을 그대로 옮겨온 구성이었다.

심플한 벽면에 그림에 집중될 수 있는 배치가 마음에 들었다.

그림 속에는 19세기 나폴리 사람들이 있었다. 보이는 그대로를 그려내어서, 마치 살아있는 듯. 그 시대를 엿볼 수 있었다. 모든 그림들이 마음에 쏙 들어올 정도로 좋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옮겨가며 한 점. 한 점을 집중해서 감상했다.


내가 보고 싶은 만큼 보다가, 남편과 동선이 겹치면 그림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또 떨어져서 걸으며 각자 보고 싶은 대로 움직이며.


그렇게 따로, 또 같이.

시간과 공간을 함께 나누었다.


전시장을 나서자, 샐쭉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고요하게 내 시간을 보내면서도, 혼자가 아니라 외롭지 않았기에, 마음이 충만해졌다.

삐쳤던 감정도 금세 사라졌다.


점심을 먹으러 내려가는 길.


백화점 입구의 커다란 트리가 푸른 가을 하늘과 함께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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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느낌이 물씬.

커다란 별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대형트리 주변을 한참 맴돌았다.

신이 나서 이리 찍고, 저리 찍고.

매서운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나는 한껏 들떠있었다.


그렇게 종종거리는 내 옆에 남편은 조용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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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 내려가, 친구에게 맛집으로 추천받은 피자집에 자리 잡고 앉았다.

화덕에서 바삭하게 갓 구워낸 피자는 너무 맛있었다.

남편은 콜라를. 나는 맥주를 시켰다.


먹으면서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남편은 중간중간, 자꾸 말의 호흡을 놓쳤다.

내 말에 집중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처럼 나왔는데, 서운했다.


문득, 전시를 보러 가자고 했을 때,

'다음에 보자. 다음에'라고 말했던 남편의 전화 너머 목소리가 떠올랐다.


오늘 나오기 싫었는데, 내가 억지로 끌고 나온 걸까.



맥주 한 잔을 벌컥벌컥 마셨다.


취기가 살살 오르자, 또 기분이 좋아졌다.

친구한테 추천해 준 이 집 피자, 정말 맛있다며 사진과 함께 쌍따봉을 메시지로 날렸다.


남편은 여전히 내 말에 살짝 늦은 반응을 보였지만, 나는 모른 척 넘어갔다.


소식하는 우리가 한 판을 다 먹어치웠다.

피자는 너무 맛있었고, 맥주는 더 맛있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유명한 서점도 들러보자며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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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 여기도 커다란 트리가 있네!"

서점답게 종이로 만든 키다리 트리 아래서 예쁜 포즈를 하고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남편의 얼굴빛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피곤한가. 괜히 눈치가 보였다.

나는 너무 신이 나버렸는데, 남편은 가라앉아 보였다.


'아, 역시 나오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래도 기왕 나왔는데. 같이 즐거워해 주면 안 되나.'


돌아가는 길에 남편은 계속, '피곤해~ 피곤해~'를 반복했다.

일하느라 바쁜 사람을 내가 억지로 불러낸 듯한 죄책감과 동시에 서운함이 밀려왔다.

못내 거절하지 못한 그의 선함도 괜스레 원망스러웠다.

피곤하면 그냥 같이 오지 말지.

같이 안 오면 삐칠 것처럼 굴었으면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남편에게로 미룬 못난 나.


그렇게 모처럼의 데이트는 어쩌면 나만 좋았을지도 모르는 상태로 끝난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은 또 현실과의 조우.

빈 냉장고를 채우는 한 바퀴.


그리고 나니,

오늘 봤던 장면들이 모조리 꿈 같이 느껴졌다.


모처럼 둘이 데이트 나오는 거라, 예쁘게 머리도 하고. 추운 날씨에도 짧은 바지에 롱부츠도 신었는데.

시금털털한 기분이 들었다.


집에 와서 저녁을 차리고 또 치우고.

남편은 방으로 들어가 잠에 들어 버렸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아서 컴퓨터를 켰다.


오늘 찍은 사진들을 주욱 둘러봤다.

분명히 내 기억에는 '피곤해'만 반복하던 남편이었는데, 나랑 같이 찍은 사진에서는 밝게 웃고 있네.

맛있었던 피자 한 판 사진. 그리고 커피를 마시러 가서는, 이 집 커피 정말 맛있다며 연신 감탄하던 남편.

오늘 봤던 그림들 중 마음에 들었던 작품들을 나누었던 장면들. 열심히 내 사진을 찍어주던 모습.

가라앉아 보였던 얼굴이지만, 그래도 희미하게 올라간 남편의 입꼬리가 서서히 떠올랐다.


부부의 온도가 늘 같을 순 없다.

중요한 건, 그래도 곁을 지켜주었다는 사실이 아닐까.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내 초대에 응해준 남편에게

그냥 '고맙다.'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분명히 남편도 오늘 좋은 시간을 보냈다 믿으면 되는 거였다.


한 잠 늘어지게 잔 뒤에,

부스스한 모습으로 하품을 하며 방에서 나오는 남편에게


"지금은 괜찮아? 오늘 많이 피곤했지?"

라고, 다정히 말을 건네보는 오늘이었다.




조용히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브런치북 1위는 살면서 처음 해봅니다.

너무나 행복한 경험이었고,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이고 제 생각이니, 물론 저에게는 하나하나 소중한 내용들이지만,

과연 내 글을 누가 읽어줄까, 하며 중얼거리듯이 썼습니다.

저의 하루에 같이 해주신 소중한 분들께 감사인사를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축하해 주신 작가님들, 지인분들도 정말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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