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하자마자 부산 집으로 갔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KTX를 타는 것 자체가 뿌듯했고 내가 마치 잘 서울에 적응한 것 같다는 착각을 하곤 했다.
첫 번째 방학은 온통 축농증 수술에 맞춰져 있었다. 그 흔한 여름 물놀이마저도 코피 팡팡 쏟으며 갔으니까.
아빠는 여전히 막내딸이 서울에 사는 것이 못마땅했고, 묻는 말마다 부정적인 결론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결국에 내가 '딴따라' 밖에 안될 거라며 말이다.
예전 같았으면 버럭! 하고 화를 냈을 텐데, 그런 비난의 말들이 아무렇지 않았다. 언니들이랑 지낸 3개월 동안 나는 많이 변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부산이 그렇게 좋은 줄 몰랐고 어른들이 왜 '고향'이라는 말 앞에 마음이 앞서게 되는지 알게 된 듯했다.
온 가족들이 나에게 맞춰 주었다. 수술도 했어야 했고 방학은 그리 길지 않았으니까.
엄마가 묻는다.
"한 학기 해보니까 뭐 어떻노?"
"재밌다. 또라이도 많아서 내가 또라이로 안 보인다."
"아이고 또라이 천국인갑네. 개안타. 어디를 가나 사람 사는 거는 다 똑같다."
"학교도 학굔데 같이 사는 언니들이 좋아서 재밌다."
"그것도 니 복이다. 사람 만나는 복. 성적은 우째 개안트나?"
(장학금 받을 수 있냐는 물음이겠지)
"어. 왠지 장학금 받을 수 있을 거 같다."
"진짜로?? 얼마나??"
"모르지. 기다려봐야 안다."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조교로 일하던 언니에게 따로 연락이 왔다.
"진아야, 너 차석이야! 축하해!!"
나는 내가 수석을 할 줄 알았다. 차석도 대단한 일인데 나는 나에게 실망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 아빠와의 끝없는 전쟁 끝에 가게 된 학교, 술도 마시지 않고 연습에만 매진했는데.. 수석을 못하다니.. 뭐 하는 건가 싶었다. 엄마는 그것마저 감사하다며 감사할 줄 아는 삶이 되어야 다음이 있다고 했다.
그땐 그 말이 너무 듣기 싫었다. 그러자 큰언니가 말했다.
"아직 7번의 기회가 있잖아? 만다고 그래 힘주고 사노. 적당히 해라~"
다른 건 모르겠고 아직 일곱 번의 기회가 있다는 말이 꽂혔다. 나는 그 뒤로 졸업할 때까지 계속 수석을 했다. 그땐 그게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실용음악과, 음대의 현실은 수석이 중요한 게 아니었고 학점은 F 받아도 곡 많이 팔아서 저작권료 많이 받고 사는 친구들이 더 인정받았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 친구들은 교수 자리도 턱턱 받아냈고 저작권료도 꾸준히 받으며 음악인으로서 살았다.
나는 연주보다 연구가 좋은 사람이었는데 우리나라는 에듀케이터와 플레이어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제한이 많다는 걸 점점 피부로 느꼈다.
아빠는 내가 수석을 하면서부터 태도가 바뀌었다. 무조건적인 지지자로. 내가 무얼 하든 아빠는 매니저 마냥 나를 도와주었다.
어딜 가나 내 자랑을 했고 공부를 더 하고 싶으면 더 하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