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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숲에서 마주친 낯선 존재

by 새벽별

덴마크에는 산이 거의 없다. 가장 높은 산인 묄레호이(Møllehøj)도 170미터 정도로 낮아, 꼭 언덕처럼 보인다. 대신, 평지로 이루어진 덴마크에는 넓은 들과 울창한 숲이 많다. 시댁 시골집으로 가는 초입에도 큰 숲이 있다. 남편이 어렸을 때, 그 숲으로 소풍도 가고 놀이터처럼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숲은 차 한 대 들어갈 정도로 길이 널찍해서, 시어머니는 늦은 오후에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러 가곤 한다.


2000년대 초, 덴마크를 처음 방문했을 때도 시부모님과 우리는 숲으로 산책을 갔다. 그때 나이 많은 푸들 믹스견, '숑'도 함께였다. 산책이라기보다는 나에게 그 숲을 소개하는 '상견례'같은 자리였다.


"예전엔 이곳에 호수가 있었지. 지금은 다 말라버렸지만."시아버지는 아쉬운 듯이 말했다


"애들이 어릴 때, 도시락을 싸서 여기 나무 아래로 소풍 왔었지." 시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옛일을 회상했다.


“저건 사냥꾼들 오두막이고, 위에 전망대도 있어. 어릴 땐 저기 많이 올라갔었어.”

어린 시절의 즐거웠던 추억으로 남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산책을 나와 신난 숑은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보며 "우푸우푸"하며 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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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가는 길 초입에 위치한 숲>

여름의 숲은 울창하고 푸르며, 또 고요하고 적막하기도 했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 꼭 우리만의 숲 같았다. 우리의 말소리와 발자국 소리, 그리고 새소리만이 들렸다. 겨울에는 을씨년스럽고 쓸쓸하지만, 나름 운치 있다. 아침에 자욱하게 안개가 깔린 겨울숲은 신비로울 정도다. 이 숲에는 사슴이 산다고 하지만, 직접 마주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시골집 부엌 창문을 통해, 어미 사슴이 새끼 두 마리를 데리고 평화롭게 풀을 뜯는 모습을 가끔 보기도 한다.


숲을 거닐면서 멀리 둘러보던 그때, 덤불 사이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어! 저게 뭐지?"


갑작스러운 나의 놀람에, 모두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찰나의 순간 그것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방금 저기서 무언가 껑충 뛰는 걸 봤어요. 갈색 같았은데, 금방 사라졌어요."


"아, 여우를 본 모양이네." 시아버지가 웃으면서 말했다.


"뭐, 여우라고요! 여기에 여우가 산다고요?"


순간 소름이 돋았다. 평화롭고 아름답던 숲은 낯설고 위협적인 공간으로 바뀌어 버렸다.

<겨울의 덴마크 숲>


여우는 한국의 민간 설화 속에서 '천년 묵은 여우'나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 같은 무서운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이들은 종종 매혹적인 여인으로 변신해 밤길을 가는 나그네를 홀리는 교활한 존재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덴마크에서 여우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작은 동물을 사냥하거나 농작물에 약간의 손해를 끼치기도 하지만, 오히려 소심한 성격이라 사람을 보면 먼저 도망친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야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지만, 오랜 시간 쌓여온 여우에 대한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숲에서 만난 이 낯선 존재는 내게 묘한 여운을 남겼고, 여운은 이후 영국에서 살던 시절에도 이어졌다. 당시 나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일했는데, 아침 손님이 많아 새벽 일찍 출근하곤 했다. 우리가 살던 곳은 1층에 식당이 딸린 허름한 3층 건물이었고,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 문을 열면 바로 작은 도로로 이어졌다.


어느 새벽, 현관문을 열자 어슴푸레한 거리에 가로등만 뿌옇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10여 미터 떨어진 길 중앙에 개가 한 마리가 앉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 그런데 주둥이가 뾰족하다! 여우다. 정말 그 순간 나를 해칠까 봐 너무 떨리고 무서웠지만, 덴마크 숲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우가 낯을 가리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나는 침착하게 걸음을 옮겼고 정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여우는 위험한 동물이 아니며, 내가 무서워했던 이유는 편견 때문이었다는 것을.


사실 한국에서 여우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으로 분류될 정도로, 그 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이젠 귀한 동물이 되었다. 한국의 민간 설화에서 전해지는 여우에 대한 편견은 먹이를 땅에 숨겨두고 파헤쳐 먹는 식습관이, 꼭 땅속의 시신을 먹는 듯한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쌓였던 오해가 결국 편견으로 굳어진 것이다.

<쓰레기를 뒤지는 런던 주택가의 여우>

여우는 단순한 동물 이상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낯선 세계가 꼭 두려운 곳이 아님을 알려주었고, 시야가 트이는 세계로 나를 이끌어 준 셈이었다. 그 이후로도, 런던에서 쓰레기통 주변을 배회하는 여우를 가끔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두렵기보다는 먹이를 구하러 도심 한복판까지 내려와 쓰레기를 뒤지는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종종 낯선 세계를 두려워하며 편견의 색안경을 끼곤 한다. 하지만, 색안경을 벗고 다양한 존재를 만나다 보면, 그들에 대한 수많은 오해와 편견의 숲에서 걸어 나오게 된다. 아마도 덴마크 숲에서의 여우와의 만남은 내가 편견에서 빠져나온 첫걸음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나는 낯선 존재와의 만남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즐기려 노력하게 되었다. 새로운 환경, 다른 문화,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것은 누구나 편견을 깰 수 있는 기회를 갖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낯선 이들에 대해 닫힌 마음보다는 조금은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덴마크 숲에서 마주친 낯선 존재였던 여우는, 낯섦과의 경계를 허물고 나를 한층 성숙하게 만든 상징적 존재로 남아있다.




여우 사진 출처: https://www.newscientist.com/article/2249298-hungry-foxes-have-been-raiding-our-bins-for-thousands-o f-years/

여우 관련 https://www.youtube.com/watch?v=H6G0dYpNim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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