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저녁이 있는 삶'과 휘게(Hygge)를 꿈꾸며

by 새벽별

곧 있을 2025년 대통령 선거에서, 각 당의 후보자들은 멋진 슬로건을 앞세워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할 것이다. 2012년에 나를 매료시켰던 선거 구호가 하나 있었다.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 후보였던 손학규 씨의 '저녁이 있는 삶'이었다.


그 시절, 노동환경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직장인들의 야근과 회식은 당연시되던 때였고, 가족과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저 꿈같은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저녁이 있는 삶'은 단순한 선거 구호를 넘어, 평범하고 여유로운 삶에 대한 바람을 담아내며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렀다. '워라벨(Work-Life Balance)'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지고, 칼퇴근과 개인의 행복을 중시하는 MZ세대도 등장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에게 아직도 '저녁이 있는 삶'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직장인들은 퇴근 후에도 업무 문자를 확인하고, 학생들은 학원과 과제에 쫓겨 저녁 식탁에서 얼굴조차 보기 힘들다. 집에 귀가한 후에도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다. 함께하는 저녁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어려운 숙제이다.


그렇다면 '저녁이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곳이 있다. 바로 '휘게(Hygge)'로 잘 알려진 덴마크이다. 덴마크어로 '편안함, 따뜻함, 아늑함, 안락함'을 뜻하는 '휘게'는,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편안한 환경에서 누리는 소박한 행복을 의미한다.


내가 경험한 덴마크 시댁에서의 저녁 풍경도 이와 닮았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가족들이 집으로 모인다. 나는 시어머니와 함께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삶은 감자 까기와 같은 단순한 일이 대부분이지만) 식탁을 세팅한다. 여름날 저녁에는 시원한 선룸이나 정원에서 주로 식사하면서,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나눈다. 시부모님은 이웃의 새로운 소식도 들려준다. "오르후스에서 스벤이 딸이랑 내려왔는데, 내일 오후 커피 타임에 잠깐 들른다고 하네."


식사를 마친 후, 주방을 정리하고 거실로 옮겨 본격적으로 '휘게'의 시간을 가진다. 시어머니는 소파 옆의 은은한 조명 등을 켜고, 초에도 하나 둘 생기를 불어넣으며 아늑한 분위기를 만든다. 겨울에는 벽난로의 따뜻한 온기가 집안을 감싸주기도 한다. 때로는 TV에서 방영되는 골등품 경매 프로그램을 같이 시청하거나, 보드게임이나 닌텐도 게임을 함께 즐기기도 한다. 승부욕이 강한 딸이 게임에서 지면 잔뜩 뾰로통한 표정을 짓기도 하는데, 모두 그걸 보고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 사이 시어머니가 만든 커피와 우리가 사 온 디저트가 준비되면 소파에 둘러앉는다. 밤에 커피를 마시면 잠 못 자는 나는 차를 마신다. 우리는 커피나 차를 들면서 오늘 있었던 뉴스나 내일의 계획을 이야기한다. 밤 11시쯤이 되면 시골의 밤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다. 시아버지는 라운지체어에 앉은 채 잠이 들고, 강아지 루나는 일찌감치 시어머니 옆 소파에서 곯아떨어져 있다. 모두 피곤함을 느끼기 시작하면 "Tak for i dag. Godnat!"(오늘 하루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인사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런 덴마크의 저녁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풍경일지도 모른다. 덴마크에 처음 방문했을 때는 '왜 다들 피곤해하면서 늦게까지 모여 있어야 할까?'라는 생각에 남편에게 불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간이 가족의 유대감을 깊게 하는 귀중한 순간이었음을 깨닫는다. 덴마크 지인들과 이야기할 때도 이 '휘게'의 시간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런 시간이 '사치'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작게나마 휘게를 실천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온 가족이 편안히 모일 수 있도록 조명과 촛불로 아늑하게 거실을 꾸미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채 차 한잔의 여유를 가지며 대화에 집중하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라도 이렇게 저녁 모임을 가져보면 어떨까? 중요한 것은 이 시간에 서로의 하루를 나누며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소한 변화가 자연스럽게 '저녁이 있는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가족과 깊은 유대감이 쌓이면 개인의 삶이 더욱 행복해지리라 믿는다.


물론, 개인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적 변화도 필요하다. '노동시간 단축'이나, '점심에 회식하기'와 같은 대안이 마련되면 좋겠다. 다가오는 대선에서 이러한 삶을 선거 구호에만 그치지 않고 현실로 만들어 줄 후보자를 기다려본다. 한국이 '저녁이 있는 삶'과 '휘게'를 즐길 수 있는 사회로 나아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이 새벽, 덴마크의 별장에서는 노을이 지고 있을 것이다. 4월 초인 요즘도 쌀쌀한 날씨 탓에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닥타닥 타들어가고, 강아지 루나는 소파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을 터이다. 시부모님은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한국에 있는 우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지도 모른다.



휘게: https://ko.wikipedia.org/wiki/%ED%9C%98%EA%B2%8C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02화덴마크의 시골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