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덴마크에 계신 시부모님과 2주에 한 번, 주말 저녁에 영상통화를 한다. 내가 먼저 간단한 덴마크어로 안부를 여쭙고, 주로 시어머니와 영어로 대화를 이어간다. 날씨는 어떤지, 건강은 어떠신지, 그동안 특별한 일은 없으셨는지. 주로 소소한 일상 이야기들이 오간다.
내 통화가 끝나면, 딸이 짧게 인사를 드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편이 한두 시간 '길게' 통화를 이어간다. 마치 그동안 못다 한 '휘게'시간의 대화를 한꺼번에 쏟아내는 듯하다. 중년의 남자가 아버지도 아닌 어머니와 그렇게 오랫동안 대화하는 게 희한하면서도 보기 좋다. 말씀이 적은 시아버지와는 중간중간 짧게 대화를 나누곤 한다.
며칠 전, 시부모님은 이웃 스벤의 초대를 받아 시내에 있는 호텔 레스토랑에 다녀왔다고 했다. 스벤은 시댁 맞은편, 길 건너 노란 집의 주인으로 중년을 훌쩍 넘긴 이웃이다. 평일에는 덴마크 제2의 도시인 오르후스에서 일을 하고, 주말이나 휴가 때는 이 시골집을 별장처럼 사용한다. 노란 집 헛간에는 삼색 고양이 한 마리가 있는데, 시어머니가 종종 밥을 챙겨준다. 시부모님은 그 집에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대신 돌봐주곤 한다.
스벤은 그런 시부모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그들을 고급 호텔 레스토랑의 '남덴마크 커피테이블(Sønderjysk kaffebord)'에 초대한 것이다. 이 커피테이블은 덴마크 남부 지역의 특별한 전통으로, 커피와 함께 무려 스물한 가지 이상의 케이크가 준비된다. 각각 일곱 가지의 부드러운 케이크, 딱딱한 케이크, 그리고 건조한 케이크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 화려하고 푸짐한 커피테이블에는 남덴마크만의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 이 지역 역사에 정통한 남편의 설명은 이렇다. 1864년에 덴마크와 지금의 독일 북부였던 프로이센이 영토 전쟁을 했다. 전쟁 후, 이 지역은 프로이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당연히 덴마크인 특히 남부 사람들의 반감은 매우 컸다.
당시 프로이센 당국은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이 지역 마을 회관에서 덴마크인들이 모이는 것을 허용했다. 하지만 술을 제공하는 모임은 금지하고, 오직 커피와 케이크만 나눌 수 있었다. 이 모임에서 지역 주민들은 덴마크 노래를 부르고 애국적인 연설을 하며 덴마크인의 정체성을 지켜나갔다. 케이크의 가짓수가 많은 이유는, 음식이 많을수록 모임을 더 길게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커피테이블에서는 가져온 음식을 서로 나누기도 했지만, 지역 부녀자들에게는 케이크 솜씨를 자랑하는 기회의 장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로부터 음식을 배웠던 시어머니는 케이크나 디저트 솜씨 또한 수준급이다. 제빵에 관심이 많던 손녀딸에게 케이크 만드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딸이 할머니의 솜씨를 이어받기를 바랐지만, 요즘은 관심이 줄어든 듯해 조금 아쉽다.
1920년에 이 지역은 다시 덴마크로 재통합되었고, 이후 커피테이블의 전통은 점차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몇몇 레스토랑에서는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남덴마크 커피테이블은 이 지역의 음식 문화 그 이상을 의미한다. 조국을 잃었던 힘든 시절에도 기지를 발휘하여, 자국의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남부 덴마크인의 노력과 단결을 상징한다.
커피테이블에 초대받은 시부모님은 오랜만에 이웃과 함께 맛있는 디저트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활기 넘친 목소리로 그 커피테이블에 담긴 소중한 역사적 의미를 나에게 소개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나도 언젠가 이 커피테이블을 꼭 경험하고 싶다. 스무 가지가 넘는 디저트를 먹으려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케이크 맛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자리에서 이웃들과 대화를 나누며 느끼는 소소한 기쁨, 그리고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그들의 심정과 끈질긴 의지를 몸소 체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앞으로 시댁에서 맛보는 케이크의 맛은 예전과 달라질 것이다.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는 순간, 그 안에 담긴 이 지역의 고된 역사와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했던 남덴마크인의 정신과 조우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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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테이블 사진 출처 https://ca.pinterest.com/pin/428897564516606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