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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시골 밥상

by 새벽별

긴 여정 끝에는 몸도 지치기 마련이지만, 극심한 허기도 함께 밀려온다. 늦은 오후에 덴마크에 도착하니, 시어머니 지트(덴마크에서는 시부모의 이름을 부른다)는 불편한 몸에도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아내를 위해, 시아버지 해닝은 바깥일에 더해 장보기와 여러 집안일까지 묵묵히 도와왔다. 이제 우리가 그 손길을 보태야 할 차례였다. 팬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프리카델레(frikadelle)'의 구수한 향은 온 집안을 가득 채우며 우리의 식욕을 자극했다.


프리카델레는 덴마크 가정에서 자주 먹는 전통 요리로, 다진 돼지고기에 양파, 밀가루, 달걀을 섞어 동그랗게 빚어 팬에 부친다. 그 위에 베이컨을 놓아 식감에 변화를 주기도 한다. 덴마크식 미트볼이라 생각하면 된다. 프리카델레에는 감자와 브라운소스가 곁들여지는데, 내가 가면 고추장도 빠지지 않는다. 남편은 오랜만에 맛보는 '고향 집밥'덕분에 여행 후에는 살이 오르곤 한다.


사실 나는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지만, 시어머니의 요리 앞에서는 예외이다. 지트의 음식은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것으로,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프리카델레를 처음 먹었을 때, 긴장하면서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고소하고 촉촉한 식감은 돼지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조차 다시 포크를 들게 했다. 오븐에서 구워내는 '플래스케스태그(Flæskesteg)'라는 요리도 별미다. 특히 돼지 껍질은 바삭한 식감이라 인기가 많다. 하지만, 나는 껍질은 먹지 않아 딸이나 시아버지에게 넘기곤 한다.



감자는 덴마크 밥상에 빠지지 않는 주식으로, 시부모님은 감자밭을 직접 일궈 수확한다. 딸은 어릴 적, 밭에서 노란 감자가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신기해하며, 작은 손으로 감자를 조심스럽게 집어 올리곤 했다. 감자밭 외에도 텃밭에는 당근, 파, 호박 등도 심어져 있어 식사 준비에 요긴하게 쓰인다. 수확량이 많을 때면, 시부모님은 집 밖에 채소를 내놓고 "무료예요"라는 문구를 붙여 이웃과 나눈다. 이런 모습은 덴마크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달걀이 떨어질 때면, 시어머니는 동네 계란장수에게 전화를 걸어 신선한 달걀을 주문한다. 큼직한 달걀은 아침 식사에는 반숙 계란으로, 점심에는 스크램블로 만들어 오픈 샌드위치인 스뫼레브뢰드(smørrebrød)에 얹어 먹는다. 가을이 되면 사과나무에서 딴 사과로 일부는 주스나 잼을 만들고, 일부는 이웃에게 나누어 준다. 솜씨가 좋은 지트는, 딸기나 라즈베리도 사서 잼을 만든다. 딸은 잼과 사과로 만든 유기농 주스로 맛있게 아침을 먹곤 한다.


식사 시간에는 독특한 규칙이 있는데, 바로 배려와 균형이다. 음식을 한 번에 많이 가져가지 않고, 옆사람을 생각해 적당량만 덜고 건네준다. 마지막 한 사람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부족하면 다시 2차를 돈다. 남자들이 좀 더 많은 양을 먹긴 하지만, 여자들에게도 모자라지도 않다. 덕분에 음식이 남는 일은 드물다.


이 집 남자들은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아, 시어머니는 내가 방문할 때마다 캔맥주 330ml를 나와 반씩 나누어 마신다. 유명한 칼스버그보다는 지역주민이 많이 찾는 투보그(Tuborg)를 마시는데, 두 여자에게 딱 적당한 양이다. 지트와 나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우리는 음료수나 맥주잔을 들고 '건배'의 뜻인 '스콜(skål)'을 외치고 식사를 시작한다.


덴마크의 시골 밥상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한 끼 식사가 아니다. 손수 기른 신선한 채소로 필요한 만큼 음식을 만들며,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도 담겨 있다. 수확량이 넘치면 이웃과 나누는 모습은 한국의 '정(情)'과도 닮아 있어, 덴마크의 시골문화가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시골 밥상에서 시어머니의 프리카델레를 한 입 베어 물며, 이번 방문에서도 그 속에 담긴 정과 사랑을 다시금 느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균형 속에서의 소박한 행복이야말로,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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